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62)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62)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21>

오늘 본문은 17절에 이런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새 것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가요? 이는 질적인 새로움을 뜻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 이게 질적인 새로움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도 말씀하죠.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 사람된 삶입니다. 


이전에 죄에 묶여있던 존재에서 이제는 주의 십자가로 죄 사함받은 존재가 되었다. 이전에 지옥갈 인생이었으나 이제는 구원 받고 천국 가는 인생이 되었다. 이전에는 죄의 종노릇하였으나, 이제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인생이 되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질적인 새로움, 영적인 새로움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주의 십자가로 새 사람된 우리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선언을 받은 우리들,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내 믿음의 터전이 중요합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죠.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 맹자의 교육을 위해서 세 번 이사했다는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환경적인 요소가 참 중요하거든요.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생각도, 행동도, 삶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신명기의 말씀에 계속 당부하십니다. “너희들이 살던 애굽의 풍속도 따르지 말고, 이제 들어갈 가나안의 풍속도 따르지 말라.” 하지만 저들의 삶이 어떤가요? 그런 환경적인 상황을 극복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내 신앙의 터전, 믿음의 터전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늘 말씀드리는대로 “말씀과 기도 위에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고, 주를 향한 기도로 그 자리를 잘 지켜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17절의 말씀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 믿음의 백성을 향해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하는데, 그 출발이 무엇인가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터전입니다. 

제가 이렇게 목회를 하면서 많은 성도님들을 만나고, 함께 신앙의 삶을 지내오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 신앙의 터전을 흔들림 없이 잘 지켜간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인 동시에, 정말 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 계속 그 자리에 계시기 바랍니다. 흔들리지 마십시오. 일희일비하지 마십시오. 이리 저리 시험들만한 일도 있고, 낙심되는 상황도 있고, 어려움도 생겨나고, 문제가 있을지라도 변함없이 내 자리를 지켜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귀한 일입니다. 우리 전후 좌우에 계신 분과 함께 인사하겠습니다.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성도님! 계속 거기 계세요.” 거기가 어딘가요? 내가 은혜 받는 그 자리입니다. 내가 봉사하는 그 자리입니다. 내가 예배하는 그 자리입니다. 내가 헌신하는 그 자리입니다. 내가 사명감당하는 그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내 믿음의 터전입니다.


언제나 예수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주의 십자가 안에, 더불어 내가 예배하고 기도하는 믿음의 터전 위에 신앙의 뿌리를 견고히 내리고 서 있을 때에,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러한 선언에 어울릴만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화목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 저녁에 속회 지도자 헌신예배 때도 화목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때 보았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에도 보면 2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사실 저부터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보통 뭔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꼭 지적을 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꼭 알려주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틀린 것을, 잘못된 것을 꼭 지적해야 직성이 푸리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 돌아보면 그게 지혜로운 게 아니더라구요. 인간 사회에서 절대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그런 영화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시대와 상황과 환경과 사람에 따라서 그때는 맞았는데, 지금은 틀릴 수도 있고, 지금은 맞는데, 나중에는 그게 틀린 게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타협할 수 없는 것, 우리가 분명하게 붙잡아야 할 진리 복음의 진리, 예수 십자가 부활의 진리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간의 관계 속에서, 이런 저런 말들 속에서, 하나만을 고집하거나, 하나만을 주장하거나 이런 것은, 그게 설령 맞다고 할지라도 지혜롭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 18절에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여기 보면 화목에 대해 두 가지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목을 이루어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이어가야 합니다. 죄를 멀리하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배와 헌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삶, 이게 곧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더불어 또 하나 우리에게도 화목하게 하는 직분, 즉 사명이 주어졌음을 깨달아 알고, 내가 속한 공동체에 화목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화목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른 바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서로 조심하고, 존중하고, 격려하고, 배려하는 삶, 그러면 나에게 주어진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의 모습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였으나, 이제는 죄 사함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내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과도 화목을 이루어가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러한 사명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과 영적으로 화목한 삶을 살아가고, 또한 우리의 걸음이 닿는 모든 곳에, 내가 모든 공동체에 나로 인해 화목함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나를 통해 귀한 것이 흘러가야 합니다. 


본문 20절에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앞서 말씀드렸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하셨다고. 더불어 모든 믿음의 백성들에게도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은 내가 속한 공동체를 화목하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진정한 화목은 모든 이들이 예수 십자가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가는 것이요, 이러한 사명은 먼저 믿는 자에게 주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먼저 믿는 자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입니다. 그래서 본문 20절에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즉 보내심을 받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권면을 너희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 권면의 내용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모두 하나님과 화목하고, 성도들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우리가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한 장 전체가 다 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럼 바울은 왜 고린도교회를 향해 이렇게 사랑에 대한 말씀을 자세히 전한 걸까요? 고린도교회에 가장 부족한 것 중에 하나가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사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성품이 안좋은 사람들만 모여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고린도라는 지역 자체가 그런 환경이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가 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가, 한 100년만에 다시 복구가 되면서 반강제적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그러다보니 계층간의 갈등도 많았고, 윤리, 도덕적인 방탕함도 많았습니다. 기본적인 환경 자체가 이리저리 나눠지기 쉬운 구조입니다. 게다가 수많은 종교와 우상숭배도 뒤섞여 있습니다. 사회적인 기본질서 자체가 잘 세워지지 않은 곳으로, 당시에 “고린도인이 되다.”라는 말 자체가 “저 사람은 타락한 사람이다.”라는 대명사로 쓰여질 정도였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예수님을 믿고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저 분열과 다툼이 많은 부족한 신앙인”이라는 평가를 받기 전에, “저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기특하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 더 합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특한 것은 기특한 거고 부족한 것은 부족한 거죠. 바울과 동역자들은 고린도교회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기 위해 애를 씁니다. 사랑을 가르쳐주고, 오늘 말씀처럼 화목을 가르쳐줍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이 사랑과 화목의 본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실제적인 삶을 통해서 아름다운 것을 흘려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권합니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주의 복음이라는 구원의 진리를 흘려보냈고, 더불어 사랑을 흘려보냈고, 화목함을 흘려보낸 것처럼, 너희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 선한 것을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것을 가르켜서 통로라고 표현합니다. 수도관도 통로고, 하수관도 통로죠. 그런데 수도관은 깨끗한 물이 흘러가는 통로이고, 하수관은 더러운 물이 흘러가는 통로입니다. 그럼 우리를 통해서는 무엇을 흘려보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통로가 되어야 하는가? 사랑의 통로, 축복의 통로, 화목함의 통로, 복음의 통로, 구원의 통로, 은혜의 통로가 되어 깨끗한 것, 귀한 것을 흘려보내야 할 줄 믿습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 말을 듣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내 모든 말과 행동과 모든 삶을 통해 아름다운 것, 복된 것, 선한 것, 정말 귀한 것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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