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10);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18~25>
할렐루야! 사순절 두 번째 거룩한 주일, 주님 앞에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오늘도 말씀의 은혜가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찾아보면, 십자가의 “로고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고스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원문 그대로 해석을 하면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도 – 십자가의 말씀”이 무엇인가요? 복음입니다. 예수 십자가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 구원과 영생과 천국의 기쁨이 주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순절 둘째 주일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눌 때에,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말씀에 담겨진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축복을 깊이 맛보는 이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본문 1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딱 대비시켜서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구원을 받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어떤 차이인가요? 본문에 분명하게 말씀하죠. “멸망하는 자들”과 “구원을 받는 우리” 그 차이입니다. 지금 현재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들. 저들의 시선에는 십자가가 미련해보인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현재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능력이요?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어지는 19절에 말씀하죠.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이어서 20절도 보십시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세상적인 지혜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세상적인 지식으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경험적인 지혜로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현재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오히려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미련하다고 말합니다.
내가 가진 지혜로 십자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진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십자가를 향한 믿음입니다. 주를 향한 믿음을 가질 때에, 어느 순간 내 안에 확신이 생겨납니다. 내 이성적인 판단, 내 세상적인 지혜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게 되고, 또한 감사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의 말씀은, 십자가의 보혈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믿음의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줄 믿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참된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본문 22절에서 23절에 말씀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유대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표적입니다. 표적이란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적적인 일들을 뜻하는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표적을 구합니다. 이어서 헬라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23절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우리 믿음의 백성들, 앞서 18절의 말씀처럼 구원을 받는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한때는 바울도 헬라인들이 추구하는 철학적 사고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철학의 도시라고 불리우는 아덴에서 바울은 자신이 배운 수사학을 가지고, 철학적인 사고로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완벽한 실패였습니다. 그래서 아덴을 지나 고린도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결단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어서 4절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사람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다가 실패한 철저한 자기 반성의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의 백성으로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는 무엇인가요? 오늘 제목과 같습니다. “십자가의 도 – 십자가의 말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세상에서 볼 때는 패배자와 같아도,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해보일지라도,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한다. 왜요? 그 거리끼는 일, 그 미련해 보이는 일을,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힘든 일, 미련해보이는 일,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일을 한다면, 그게 나를 위한 일이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그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그 사랑 받은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가 여기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적인 판단 기준을 내려놓고,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것, 참된 영적 가치를 추구하고 또한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본문 24절에 말씀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18절의 말씀이나, 24절의 말씀에서 동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자가 누구인가요? 구원을 받는 우리들,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구원을 받는 우리들의 삶의 방향성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지혜로 판단하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왜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요? 바울의 마음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느냐?” 그게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했느냐?”에 대한 관심보다 “나는 지금 예수님처럼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전하셨는가?”를 알기보다, “나는 지금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내 삶에 예수님의 흔적이 새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말하잖아요. “사랑하면 서로 닮아간다고.”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 받은 주의 백성된 우리들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임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하나 뿐인 둘도 없는 오직 구원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말씀에 담겨진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에 새겨진 주의 사랑과 은혜를 내 마음에도 새기고, 또한 내 삶에 예수님의 흔적을 새겨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