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30 ; 작가 - 재닛 프레임 (Janet Frame)
<1924년 8월 28일~2004년 1월 29일>
“영어로 글 쓰는 여성 작가 가운데 제일 뛰어나”
재닛 프레임 하면 떠오르는 것은 '빨강 머리에 뚱뚱한 몸매'였다.
지인들은 그가 '우스갯소리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재닛 프레임은 세상을 등지고 살아왔다고 털어놓았다.
어쩌면 주홍 글자처럼 새기고 살 수밖에 없었던 '정신' 문제가
평생을 짓눌러서 그랬는지 모른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대하소설 《토지》를 쓴 작가 박경리(1926~2008)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쓴 시 <옛날의 그 집>의 한 부분이다. 모진 세월을 보냈지만 뒤돌아보면 ‘버리고 갈 것만 남았을 뿐’이라는 고백이 진정 우리에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재닛 프레임은 많은 키위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는 뉴질랜드 대표작가다. 그가 써낸 작품집 스무 편 가운데 서너 권 정도는 뉴질랜드 사람들 책장에 꽂혀 있다. 수많은 키위에게 책 읽기의 기쁨을 선사해 준 재닛 프레임이 있어 뉴질랜드는 행복했다.
가난한 철도 엔지니어 딸로 태어나
재닛 프레임은 1924년 8월 28일 더니든에서 다섯 형제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가난한 철도 엔지니어 딸로 이 세상에 나온 그의 어린 날은 궁핍하기 그지없었다. 어머니는 남의 집 도우미로 살림을 보탰다. 늘 돈에 쪼들린 가족은 하루하루 버텨내는 일조차 버거웠다.
오빠는 간질을 앓고 있었으며 다른 자매는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었다. 가족사만 놓고 본다면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어린 시절을 꿋꿋이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는 ‘교육’ 덕분이었다. 다른 것은 못 해줘도 교육만큼은 제대로 받게 하려던 부모의 열정은 그에게 세상을 앙버티며 살게 해 준 크나큰 힘이었다.
프레임은 더니든에 있는 초.중등학교를 거쳐 교육대학을 2년 다녔다. 그리고 교사가 됐다. 하지만 교사 생활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그만둬야만 했다. 정신에 이상이 느껴졌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스물한 살 때 일이었다.
마음을 크게 다친 그는 2년 동안 노인들을 돌보며 시간을 보냈다. 1947년 프레임은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았다. 임상환자로 입원해 정신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의학적으로 밝혀보려는 뜻에서였다.
임상환자로 있던 7년 동안 200회에 가까운 전기충격요법을 받았다. 결론은 ‘근거 없음’. 정신에 이상이 있는 환자라면 어떻게 그토록 뛰어난 문학 작품을 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프레임은 첫 단편집 《더 러군 앤드 어더 스토리즈》(The Lagoon and Other Stories, 석호와 다른 이야기들)로 휴버트 처치 메모리얼 상(Hubert Church Memorial Award)을 받았다. 이 상은 프레임이 정신병 환자일지도 모른다는 꼬리표를 완전히 떼어냈다.
문학 지원금 받아 유럽으로 연수 떠나
첫 단편집은 어린 날 추억을 담고 있다. 가난한 부모와 다섯 형제가 빚어낸 삶의 퀼트 조각들이 작품 속 구석구석 활자에 박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1954년 프레임은 오클랜드 타카푸나(Takapuna)로 올라와 새 둥지를 텄다. 작가 프랭크 사지슨(Frank Sargeson, 1903~1982)의 초대를 받았다. 사지슨은 자기 집을 창작실로 쓰도록 내어줬다. 프레임은 사지슨을 문학 멘토로 삼아 창작에 전념했다.
이듬해 그는 정부 문학 지원금을 받고 유럽으로 연수를 떠났다. 7년 동안 영국, 안도라공화국을 돌며 작품을 썼다. 그 가운데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품은 자전 소설인 《아울스 두 크라이》(Owls Do Cry, 올빼미도 운다)였다. 이 작품으로 프레임은 뉴질랜드 작가에서 세계적인 영어권 작가 반열에 들어섰다.
재닛 프레임은 마흔이 넘어 뉴질랜드로 다시 왔다. 한평생 돈 없이 고단한 삶을 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끝내고 미국으로 건너가 몇 작품을 더 펴냈다. 미국을 배경으로 작품을 쓰면서 3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져 가는 세상을 고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투 디 이즈-랜드》(To the Is-land, 1982년), 《언 에인절 앳 마이 테이블》(An Angel at My Table, 1984년), 《디 엔보이 프롬 미러 시티》(The Envoy from Mirror City, 거울 도시에서 온 사절, 1985년)을 한 권으로 묶은 《에인절 앳 마이 테이블》(Angel at My Table, 내 책상 위의 천사)이었다. 작가의 어린 날과 정신병 임상환자로 치료받던 과정을 문학으로 일궈낸 이 작품은 평단으로부터 ‘20세기에 나온 가장 훌륭한 자전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두 번이나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올라
《내 책상 위의 천사》는 영화 <피아노>(Piano)로 잘 알려진 뉴질랜드 영화감독 제인 캠피언(Jane Campion, 1954~)이 1990년 영화로 만들어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7개 부문에서 상을 받은 작품이다.
재닛 프레임은 뉴질랜드는 물론 미국 프랑스 칠레에서 유명한 문학상을 두루 받았고 두 번이나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올랐다. 오타고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명예를 안았으며, 2003년에는 여든 가까운 나이에 총리가 주는 소설 부문 상을 탔다. 또 그해 ‘살아있는 예술가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다.
이웃 나라 호주 출신으로 197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패트릭 화이트(Patrick White, 1912~1990)는 “재닛 프레임은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했으며, 하버드대학 비평가인 존 베스턴(John Beston, 1930~)은 “재닛은 영어로 글을 쓴 여성 작가 가운데 제일 뛰어났다”고 극찬했다.
재닛 프레임 하면 떠오르는 것은 ‘빨강 머리에 뚱뚱한 몸매’였다. 지인들은 그가 ‘우스갯소리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재닛 프레임은 세상을 등지고 살아왔다고 털어놓았다. 어쩌면 주홍 글자처럼 새기고 살 수밖에 없었던 ‘정신’ 문제가 평생을 짓눌러서 그랬는지 모른다.
고향 언덕에 유골 뿌려달라고 부탁
재닛 프레임은 죽음을 앞두고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유골을 아버지와 형제들이 묻혀 있는 고향 언덕에 뿌려줘. 그곳에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또다시 식구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
2004년 1월 29일 재닛 프레임은 한 줌 재로 사라졌다. 백혈병이 원인이었다. 고단한 육신은 자연 속에 묻혔지만 그가 일궈낸 문학은 아직도 키위 가슴속에 살아 꿈틀대고 있다.
글_박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