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68) 요한이 만났던 주님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68) 요한이 만났던 주님 <요한일서 1장 5절 ~10절, 4장 7~11절>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장 큰 변화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저는 가장 큰 변화를 입었던 사람은 요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요한의 모습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세상적인 탐욕으로 가득한 자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의 권력자가 될 줄 알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부탁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 만약 당신이 왕이 되시거든 제일 좋은 자리에 우리를 앉혀주소서.  

 

이어서 두 번째로 요한은 폭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혈기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제자는 베드로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좋지 못한 성격을 갖고 있던 사람이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52절과 53절에 보면 예수님을 찬양하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유황불을 던져 죽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선포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예수님께 던진 이 한마디 속에 그의 폭력성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탐욕으로 가득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요한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로 변화됩니다.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나요?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은 부활절 이후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그것으로 끝나면 되는 걸까요? 구원의 기쁨,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 자라면 내 삶 가운데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과 같이 내가 이전에는 험담하기 좋아하던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내 입에서 사랑이 넘쳐나야 하며 내가 이전에는 세상의 것을 탐했던 자였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이 만났던 그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요한이 만났던 그 예수님 내가 내 입술로 고백하며 내 삶 가운데 변화를 경험하는 시간되길 소망합니다.  

 


첫째 빛이신 주님을 만나는 것.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부자는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알고 세 아들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서 아들들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10 센트씩을줄테니 오늘 저녁때까지 이 빈방을 채울 수 있는 무엇인가를 구해오너라” 첫째 아들은 10 센트로 건초더미를 잔뜩 사왔습니다. 그 많던 건초더미로도 방의 절반만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둘째 아들은 솜을 사왔습니다. 그 역시도 이 큰 방을 채우기는 턱없이 부족 했습니다. 그리고 셋째 아들이 차례가 되었습니다. 막내는 주머니에서 양초를 꺼내며 말합니다. “아버지 시장을 돌아다니는데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다보니 1센트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는 돈으로 이 양초를 사왔습니다.” 그리고선 방의 모든 불을 끄고 양초를 켰습니다. 그러자 방 안에 따듯한 빛이 가득하여졌습니다.  

 

막내 아들이 사온 양초는 어두운 방을 빛으로 비추었습니다. 또한, 그가 베푼 선행으로 말미암아 배고파 굶주리던 아이들도 빛을 보게 됩니다. 막내아들이 남은 그 1 센트를 가지고 촛불을 사와 그 넓은 방을 밝혔던 것처럼 하나님은 어둠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비추시는 따뜻한 빛이 되어 주십니다.  그 빛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소망의 빛이요, 어둠으로 가득한 우리 세상 가운데 희망의 빛이 되어 집니다. 


 빛은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절대적인 속성은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어둠을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우리가 흔히 어둠과 빛이 싸운다라고 표현하는데 싸우는 것이 아니죠. 빛이 통과하면 어둠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됩니다. 그만큼 빛이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우리는 빛의 자녀된 자들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빛이 가득하면 어떤 어두움도 사라지게 될 줄 믿습니다. 


이어서 빛의 절대적인 속성이 한가지 더 있다면 반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거울이나 반사체가 있으면 그대로 반사가 되어 집니다. 오늘 말씀에 적용해서 본다면 우리의 모습 가운데 빛 되신 그 하나님의 모습이 그대로 비춰보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의 이름을 믿고 또 그 이름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빛이라는 소명을 갖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을 밝히 비추며 거짓으로 가득한 그 땅 가운데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신앙의 모습들이 우리 삶 가운데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빛에 비추어 나의 삶을 다시 비추어보고 날마다 나의 삶이 주님의 빛 가운데 거하고 있는지 점검하며 나아가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저희가 되길 소망합니다.  

 


둘째로 , 사랑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래된 찬양 중에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의 후렴이 이렇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이와 같이 사랑이라고 하면 그 단어는 정말 짧은데 그 안에 정말 많은 의미와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간 특별히 이 찬양의 가사에 기록된 고백을 중심으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해보려 합니다. 


먼저 그 사랑은 찬양의 고백과 같이 모든 것을 감싸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참된 아들로서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침을 뱉는 자들을 위해서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셨습니다. 저들이 잘못되었다고, 내가 너희를 위해 이렇게 고생한다며 화를 내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저들을 끝까지 감싸주십니다. 저들이 변화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 우리가 사랑 앞에서 자주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끝까지 믿지 못함이 아닐까요. 끝까지 믿어줄 것이라고 하면서 자녀들에게 나의 남편에게 아내에게 결국 참지 못하고 던진 그 한 마디가 사랑을 무너뜨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성도님들, 끝까지 믿어주고 참아내는 것 또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언젠가 변화될 그 한 사람을 위해 사랑으로 참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어서 사랑은 아픔을 참아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그 고통의 현장이 두려움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는데 고통이 따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데 있어서 왜 고통이 따를까요? 나의 것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이런 시가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실로 어마한 일이다. 그 사람이 내게로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내게 들어올 수 있도록 내 것을 내려 놓아야하기 때문에 고통입니다. 


이 사랑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자가 바로 요한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 가운데 거하자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구했던 자가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 요한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시간 주님의 깊은 사랑이 마음 가운데 임할 때 요한이 사랑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 사랑의 감격으로 말미암아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옆에 있는 나의 모든 이웃들을 위해 모든 것 감싸주며 참아내며 끝까지 사랑하는 우리 광림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끝으로, 용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요한과 더불어 공관복음서에 쌍둥이처럼 계속해서 등장하던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형제 야고보입니다. 그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바뀝니다. 그가 첫 번째 순교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용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인들에게 잡히고 심판장으로 끌려가실 때 주님의 곁에 그 어떤 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모욕과 멸시 속에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죽음과 사망의 권세에서 승리하신 주님께서는 무덤의 문을 열고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십니다.  성도님들, 눈 앞에 죽은 줄 알았던 그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제자들이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정하자 곧바로 엄청난 죄책감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4장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듯, 천천히 제자들에게 다가갑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용서는 화해를 해야하는 사람이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먼저 다가가야지 맞는 도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주님은, 용서의 하나님은 반대로 제자들에게 다가와주십니다. 나에게 다가와주십니다. 


성도님들, 참된 용서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와 용서의 손길을 내미셨듯이 너희도 매일 같이 먼저 다가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용서하기 어려운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과 용서를 행하여주신 것처럼 빛을 따라 사는 자로서 마땅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입었으니 나 또한 빛의 자녀로서 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님들, 바라옵기는 이 시간 요한이 만났던 그 주님을 만나는 이 자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내 삶을 통하여 주님의 빛이 비추어지게 되고 내 삶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이 보여지며, 내 삶을 통하여 죄책으로 깊은 늪에 빠진 자들이 용서함 받는 자리가 되어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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