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29편] 낯 뜨거워

교민뉴스


 

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29편] 낯 뜨거워

일요시사 0 1073 0 0

내 나름으론 뉴질랜드 애환을 그린 책이었지. 꼭 필요하다 여길 이들에게만 사인해서 한 권씩 줬거든. 

옆에서 보던 이가 자기도 한 권 달라더구먼. 

별로 책을 좋아하지 않는 이였어. 이게 꼭 말썽을 일으키더라고. 

아내가 그 집에 갔었나 봐. 차를 한 잔 내오기에 마시는데, 

옆 식탁에서 라면을 먹던 그 집 막내아들이 그 시집을 뜨거운 냄비 받침으로 쓰더라는 거야. 

겉 표지에 내 얼굴까지 인쇄돼있는 시집을. 몇 번이나 그랬는지 라면 국물로 범벅이 됐더래. 

아내가 무척 속상해하더라고. 

뜨거운 냄비에 낯 뜨거워! 하지 않았냐는 거야

 

 

시니어 셋이서 골프를 마치고 세꼬시 횟집에 들어섰다. 샤워까지 한 터라 몸은 가뿐했다. 이제는 속이 빈 배에게 자비를 베푸는 시간. 미리 예약한 상에 푸짐한 밑반찬이 가득했다. 얼마만인가? 이런 자비의 시간이. 사람이 살며 스스로에게 자선을 베푼다는 것이. 어쨌든 셋은 죽이 잘 맞아 취미운동도 함께하며 몸도 잘 챙겼다. 늘그막에 갖는 여유와 평안이 뉴질랜드의 골프장 그린처럼 푸르렀다. 

 

“세꼬시 횟감 맛, 죽이네 정말! 골프 치고 먹는 저녁 식사로는 딱이야.”

 

피터가 세꼬시 회 쌈을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이어서 또 깻잎에 백김치를 깔았다. 세꼬시를 쌈 양념장에 푹 찍어 그 위에 올렸다. 생 마늘과 생 고추도 얹었다. 깻잎으로 싸서 다시 입에 넣었다. 눈을 감고 맛을 음미했다. 오물거리자 볼이 터질 듯 했다. 피터 맞은 편에 앉은 존과 요셉도 몸 공양에 푹 빠졌다. 

 

“와~오늘은 버디도 한 개 잡고. 세꼬시 회까지 들고. 더 좋을 수는 없는 날이네 그려.”

 

존 역시 꼬드득 꼬드득한 식감에 취해서 소주 한잔을 더 호로록 마셨다. 기분이 짱 이었다. 몸도 마음도 오늘은 실컷 호강하는 날. 누가 뭐래도 이순간, 지금 여기 셋이 세상의 중심 아닌가? 이민 초창기 때는 몸 바쳐 일하느라 다른 데 정신이 없었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오늘 파는 꽤 많이 했어. 세꼬시 꼭꼭 씹어먹으니 고소하기 이를 데 없구먼.”

 

지난 주 내내 아파서 얼굴이 푸석했던 요셉도 오랜만에 흥이 돋아 보기에도 넉넉했다. 한 주일에 한 번씩 치는 시니어 골프 게임에 온 몸과 마음을 쏟으니 입맛이 살아난 것일까? 이민 와서 살아가며 늘그막에 이런 말동무와 취미 운동이 있다는 것이 여간 고맙지 않은 일. 자녀들은 독립해서 사느라 바쁘다. 한 번씩 가끔 손주들과 밥 함께 먹는 것이 또 다른 낙이다.

 

셋은 오클랜드 서쪽에 살아오면서 이민생활의 애환을 함께 나눴다. 나이 들어 골프만한 운동이 없었다. 무엇보다 녹초록의 그린을 밟으며 샷을 날린다는 것.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도 함께 날려 가슴이 확 트였다. 남은 인생 마무리도 잘 맞은 골프공처럼 반듯하게 날아가길 바랬다. 예전에는 운동한다고 와이타케레 골프장엘 다녔으나, 워낙 업 다운이 심해서 힘들었다. 마치 등산하는 듯했다. 요즘엔 평평하고 완만한 레드우드 골프장이 편해서 단골 멤버가 되었다. 세꼬시 횟감에 소주 한잔씩 걸치니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그동안 가슴 저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던 불편한 속내까지 다 털어놓았다.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이 드네. 왜 있잖은가? 나는 좋다고 생각해서 상대에게 뭘 알려주는데도 영 반응이 시원찮은 경우가 있더라고. 지난주만 해도 그랬지. K라는 사람이 노상 기운이 없어 보이길래, 내가 먹어보고 효과를 본 건강식품을 알려줬지. 비타민과 면역력에 좋다는 제품이었어. 나이 들면 부족하기 쉽잖은가? 그런데 웬걸 별 관심도 없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구먼. 내가 무슨 약을 판 것도 아닌데. 내 성의가 무시당하니 기분이 좀 그렇더구먼.”

 

“피터, 자네가 나한테 권한 그 건강식품, 난 참 몸에 좋던데. 매일 비타민 한 알과 면역력 제품 한 알은 꼭 챙겨 먹지. 내가 경험해서 좋은 것도 남이 안 받아들이면 굳이 신경 쓸게 없어. 넘어가는 거야. 꼭 필요한 사람에게는 약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간섭이지. 뉴질랜드야 내가 경험해봐서 좋은 것은 알려주고 받아들이며 내 지평을 넓혀가지 않은가. 그게 바로 나눔이고 관심이지. 통하는 사람은 통할 거고, 다 제 복이지”

 

존이 피터 말에 응답을 하며 피터에게 한 잔을 따랐다. 요셉도 맞장구를 치며 셋이서 건배를 했다. 세꼬시 횟감에 소주라. 거기에 매운탕까지 가세하니 이만한 궁합도 드물었다. 취기가 짜르르 퍼지는 친구 얼굴 보는 것만도 흐뭇했다. 뜨거운 매운탕 국물 맛도 얼큰했다. 서로 통하는 이야기에 배까지 두둑하게 채우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존이 자기 속상한 이야기 좀 들어보라며 피터와 요셉에게 털어놓았다. 

 

“잘 살아 보더라고. 인생 뭐 별건가. 좋은 것 서로 나누고 고마운 마음으로 사는 게지. 상대가 진심으로 바라는 일 아니면 권할 것도 없지. 지난번에 내가 어렵사리 시집 한 권 내지 않았는가. 내 나름으론 뉴질랜드 애환을 그린 책이었지. 꼭 필요하다 여길 이들에게만 사인해서 한 권씩 줬거든. 나를 이해하고 내 시를 공감하는 이들에게 말이지. 어느 모임에 가서 친한 이에게 한 권 건넸지. 옆에서 보던 이가 자기도 한 권 달라더구먼. 별로 책을 좋아하지 않는 이였어. 달래서 주긴 했는데. 이게 꼭 말썽을 일으키더라고. 아내가 그 집에 갔었나 봐. 차를 한 잔 내오기에 마시는데, 옆 식탁에서 라면을 먹던 그 집 막내아들이 그 시집을 뜨거운 냄비 받침으로 쓰더라는 거야. 겉 표지에 내 얼굴까지 인쇄돼있는 시집을. 몇 번이나 그랬는지 라면 국물로 범벅이 됐더래. 아내가 무척 속상해하더라고. 뜨거운 냄비에 낯 뜨거워! 하지 않았냐는 거야.”

 

듣고 있던 요셉이 존의 빈 잔에 소주를 가득 부었다. 자기 일처럼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한 채 말을 이어갔다. 동병상련의 가슴이 따로 없었다. 응원 군이었다.

 

“참, 내가 들어도 속 상하네. 어찌 남이 쓴 귀한 시집을 뜨거운 냄비 받침으로 쓴단 말인가? 정말 자네 낯뜨거웠겠네. 진심으로 바라는 이에게 주어야지, 그 가치도 모른 욕심쟁이에게 주면 꼭 탈이 난다니까. 나도 옛날에는 꽤나 남한테 퍼주고 신경깨나 썼지. 오지랖이 넓다고 아내에게 지청구도 많이 들었어. 예전에 한국에서 직장 생활하며 몸에 밴 게 그대로 나왔지. 자동차 정비 수리 일을 많이 해서도 그랬지만, 뭔가를 거들어 주고 싶어 하는 천성은 못 말리겠더라고. 아내 친구가 집에 놀러 오면 엔진오일이나 미션오일 또는 냉각수나 바테리액을 확인해줬지. 간혹 미션오일이 떡이 되다시피 절은 차도 있더라니까. 바로 교환하라고 조언을 해줬지. 차가 더러우면 세차까지 해줬고. 일요일 날 쉬면서 내 집에 온 손님 차에 내가 할 수 있는 서비스를 하는 게 나쁜가. 그 남편이 나를 만나더니 따지더라고. 누구 남편은 이러이러한데 참 고맙더라, 당신도 좀 그래 보라고 자기 아내한테 야단을 들었대. 날 더러 그러지 말래. 내 어이가 없어서 그다음부터는 그 일도 그만뒀지.”

 

남의 일 같지 않다며 피터가 요셉과 존에게 거국적인 건배 제의를 했다. 건배는 그날의 이야기 중 가슴을 쿵 찧거나 가슴을 싸하게 한 단어 중에서 골랐다.

 

“낯 뜨거워!”

 

“낯 뜨거워!!”

 

한 잔씩 들이키며 매운탕으로 속을 풀었다. 피터가 두 친구를 바라보며 남은 이야기를 마저 했다.

 

“사람은 남이 어려울 때 돕는 건 잘하지. 못하는 게 딱 있어. 남이 나보다 잘 되는 건 못 봐주지. 남이 잘 됐을 때 응원해주고 격려를 하는 자야 말로 대인 배지. 앞으로는 낯 뜨거울 일은 피하자고. 줘도 그만 안 줘도 그만인 사람한테는 물러서고.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는 이에게는 성심 성의껏 대해줘야겠어.” *

 

음식점 앞, 벤치에 앉아 차를 한 잔씩 마셨다. 앞으로 더는 낯 뜨거워질 일이 없을 거라 기대하는 마음으로 여유도 들이켰다. 저녁 풍경이 그림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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