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들(15)] 제인 할머니의 소망
<사진: 김인식>
나는 오클랜드 서쪽 끝 헬렌스빌에서 15년째 살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다들 낯이 익다. 워낙 작은 동네여서 슈퍼에서 부딪히면 도서관에서, 또는 길을 걷다가도 만나게 된다. 그중 몇 번 부딪힌 적이 있는 참 고우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할머니가 계셨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름다운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그녀의 이름이 제인이다.
어느 날 딸과 함께 진료실로 들어오셨다. 나이는 90세. 허리를 다쳐 걷기마저 힘들어 딸의 부축을 받고 오셨다. 다른 도시에 사는 딸은 제인을 진료실에 모셔다드리고는 치료 시간이 끝날 즈음 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딸은 그사이 동네 친구네를 방문한다. 몇 번 치료가 이어지면서 제인과 나는 친구가 되었다. 진료실에 오시면 이야기하느라 치료 시간이 빠듯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딸이 바쁠 때면 집으로 와줄 수는 없는지 묻는다. 예약 환자가 기다리지 않으면 침구 가방을 둘러메고 한걸음으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한동안 제인의 연락이 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시 넘어져 병원에서 퇴원해 양로원에 계신다며 엄마가 한번 다녀가라 하신단다. 양로원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라운지에는 할머니 두 분이 거리를 두고 앉아 계셨다. 무표정한 얼굴에 아무 말 없이 시선은 아래로 고정한 채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내가 그 앞을 지나쳐도 눈길은 고사하고 미동도 하지 않으신다. 주변을 서성이고 있으니 직원으로 보이는 분이 다가와 누구를 찾는지 묻는다.
제인 방으로 안내를 받은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사이 수척해진 얼굴의 움푹 팬 큰 눈에는 금세 눈물이 맺힌다. 애써 외면한 채 포옹하며 인사를 나눴다. 그간 안부를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함께 잡은 손은 그 방을 나설 때까지 놓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으시단다. 집에 가면 아픈 것도 금방 나아질 것 같다는 제인. 엄마 품이 그리운 아이처럼 집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치신다.
반가운 전화가 왔다. 집으로 돌아오셨단다. 나는 다시 침구 가방을 준비한다. 그녀의 차가 집 입구에 세워져 있다. 주인을 기다린지 오래인 듯 먼지로 덮여 있다. 슈퍼를 오가며 운전을 하시던 제인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왠지 다시는 운전석에 앉아있는 제인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제인 차를 지나쳐 벨을 누르려고 하자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린다. 잔잔한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곳으로 발길을 내디딘다. 베란다로 향하는 길이다. 제인의 집은 자그마한 침실 두 개로 된 유닛(Unit)이다. 현관문을 거치지 않아도 건물 옆 통로로 가면 거실과 연결된 베란다가 나온다.
운 좋게도 제인 집의 거실에선 확 트인 들판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베란다를 향해 몇 발자국을 걷다 보니 레이지 보이 의자에 앉아 들판을 바라보듯 앉아있는 제인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아마도 집 앞 들판을 거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을까 잠시 상상해본다. 베란다 문에 길게 늘어져 있는 하얀 커튼은 바람에 날려 살랑살랑 춤을 추고 있다. 얼굴에도 시원한 바람이 느껴온다. 양로원에서 그렇게도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제인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제인의 얼굴은 이렇게 그냥 죽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웃음을 머금은 듯 보이는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나 역시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숨죽이며 제인이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워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시디가 끝나 음악이 멈추자 동시에 제인도 눈을 뜬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늘 그렇듯 미소로 나를 반겨 주었다.
석 달 정도 지났을까. 딸이 엄마의 부고를 알려왔다. 오레와에 있는 장례식장에는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듯했다. 그녀의 모습이 담긴 카드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낯이 익은 동네 분들에게 묵례로 간단히 인사를 한 후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가족이나 지인 중 한 사람 한 사람씩 앞에 나와 제인과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제인을 그리워하며 그녀와 나눈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웃다가도 다시는 볼 수 없는 현실을 이야기할 때는 슬픔으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 이제야 그녀의 부재가 실감이나 마음 한 쪽이 아려온다.
평화로운 그녀의 집에서 나에게 보여준 아름다운 미소로 가족과 작별을 나눴을 것이다. 그녀의 집 앞을 지날 때면 눈을 감고 들판을 바라보던 제인이 나에게 손짓하는 것만 같다. 보고 싶다 제인 할머니가.
글: 메이
[글쓰는 사람들]
‘글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