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십자성 아래서] 노인들의 거짓말
올해는 ‘노인 학대 인식의 주간’이 이번 달 15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된다. 뉴질랜드의 대표적인 노인복지 단체인 에이지 컨선은 매년 이 행사를 전국적인 규모로 진행하고 있다. 특히 이 기관은 모든 세대가 주목해야 할 노인 학대의 유형으로 정서적 폭력에 의한 학대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가 사소하게 넘겨버릴 수 있는 사항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음식이 짜다고 시어머니에게 폭언을 하며 화를 내는 못된 며느리, 집안 노인들 몰래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는 뻔뻔스런 일가족, 늙은 어머니의 예금통장마저 빼앗으려는 파렴치한 아들.
위에 나열한 사례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전형적인 불효 가정들의 모습이며, 심각한 노인학대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라고 한다.
노인학대는 이민가정 전체를 불행에 빠뜨리는 결정적인 위협요소가 될 뿐만 아니라 노인들을 가정에서 내쫓아 생활고와 질병, 소외감 등으로 개인적으로는 고독사에 이르게 하고 심각한 사회문제로 발전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올드 코난이 재해석한 이솝우화 중 노인과 죽음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시골의 어느 가난한 노인이 지게에 땔감을 가득 싣고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늘 사는게 힘이 들었던 불쌍한 노인은 그날따라 몸과 마음이 너무 힘이 들었다. 나무가 가득 실린 지게를 내려 놓고 길가에 앉아 쉬면서 노인은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는 더 이상 살기 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 노인은 혼잣말로 이렇게 말한다. ”이제 그만 저승사자가 나타났으면 좋겠군“ 노인의 말을 들은 저승사자가 노인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뭐 도와줄 일이 있소?” 노인은 갑자기 나타난 저승사자를 보자 겁이나 이렇게 대답했다. “오, 참으로 좋으신 분이군요. 마침 잘 오셨습니다. 지게가 무거워서 일어나기 힘들군요. 저를 일으켜 세워 주시겠습니까?” 죽고 싶다는 말은 오히려 살고 싶다는 말인 것이다.
정말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승사자를 막상 불러 보니 살고 싶어진 이 노인의 이야기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일깨워 준다.
이 글에서 작가는 노인들의 가장 큰 거짓말은 “이제 그만 죽어야지”라는 말이라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결국은 죽게 된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노인들도 그래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빨리 죽어야지”, “바쁜데 오지마”, “니네끼리 즐겁게 놀다와”, “나는 괜찮아”, “이 나이에 무슨 돈이 필요하냐”라는 노인들의 단호한 언어는 거의 다 반어법적인 수사로 정반대로 해석하면 자녀들은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스겟소리를 한다..
오클랜드에는 70세이상의 노인들이 약 3-4백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은 자녀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느냐를 떠나 이민자로써 사회생활에 큰 장애를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 경제적 자립, 여가활동, 장보기, 대인 관계 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건강관리에도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해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들에 대한 심도있는 현황파악과 대책수립이 절실하다.
우리는 고령화 시대에 살고 있다. 2045년이되면 전 세계 어는 곳이든 6시간이면 갈 수 있고, 인간 수명이 120세에 이르다는 전망이 나온 지 오래다. 컴퓨터와 로봇이 지배하게 될 미래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어떻게 지켜 나가게 될 찌, 필자는 심히 걱정이 된다.
고사성어 중 "전사지불망 후사지사(前事之不忘 後事之師)"라는 말이 있다. '지난 일을 잊지 않음은 뒷일의 스승이 된다'는 의미이다. 인간에게 역사는 하나의 거울이다. 과거사를 반추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 사실을 알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과거를 반추함으로써 현재를 인식할 수 있고 이를 근거로 또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한편 과거와 현재는 이미 지나쳐 왔거나 처해 있는 부분이므로 인간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다. 오직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부분은 미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에 대해 본원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현재 어떻게 행동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해 어떻게 준비하고 대비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
글_김재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