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십자성 아래서] Hut 벽난로
그랬다. 아내의 뜬금없는 제의가 사뭇 의외였다. 이달이 가기 전에, 꼭 한번 Hut에 가서 벽난로 체험 좀 해주고 싶다고. 열 일을 제 박사하고 따라야겠지, 선뜻 승낙했다. 모처럼 비번(Off Duty Day)을 맞은 월요일 아침, 느긋하게 집에서 쉬나 싶었는데, 웬 바람일까? 요즘은 누가 만나자고 하거나 밥 한번 먹자고 하면 망설임 없이 오케이 한다. 누가 불러줄 때, 내 사정 앞세워 미루지 않는다. 내 다른 일을 뒤로하고 그 시간을 비워둔다. 나이 들며 습관이 바뀌는 걸까.
아내와 배낭들을 꾸려 싣고 와이타케레 피하 쪽으로 차를 몰았다. 가을비 내리는 아침, 도로 주변 농장에서 빨간 감나무 잎들이 손을 흔들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전망을 지닌 씨닉드라이브는 대 장관이었다. 도로 양쪽에 카우리, 리무 나무들이 도열해 있었다. 물에 젖은 숲의 열병을 받으며 쉬엄쉬엄 지나갔다. 드디어 Ongoruanuku Hut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차를 세웠다. 비가 줄곧 내렸다. 배낭을 메고 형광색 판초 우의를 뒤집어썼다. 다음 달부터는 이 트램핑 코스가 닫힌다는 안내 팻말이 보였다. 최근 논란이 되는 Kauri 숲 병충해를 막기 위해 입산 금지가 된다고. 강도 높은 조치인 듯도 싶다. 아내가 얼마 전 출사 차, 이곳을 다녀왔던 모양이다. Hut에서 벽난로를 피우고 온 추억이 너무 좋아서 오늘 그 체험을 하게 해주고 싶어서 함께 왔다고. 눈물 나는 일이로고. 평소 면박(?)을 자주 하더니만. 어째 미안한 구석이라도 느꼈던가, 감지덕지해야지.
Kauri Die back? 대를 위해서 소가 희생해야 한다고, 등산 금지라. 그런 결정은 오클랜드 광역시에서 심사숙고 끝에 내렸을 법하다. 믿고 따르기로 하고, 등산로 문 닫기 전에 다녀오는 것이 우선이다. 예기치 않은 여정, 기대가 된다. 앞서 걸으며 안내하는 아내를 따라 걷는다. 산속에 단 둘뿐이다. 비를 맞으며 형광색 판초 우의가 숲속으로 멀어져 간다. 달마가 서쪽으로 간 까닭(?)을 생각도 해본다. 아내를 뒤따라 걸으며 스마트폰으로 몇 컷 찍는다. 몇 년 뒤에 등산로를 개장한다면, 이렇게 올 수 있는 게 선물 같은 날일지도 몰라. 그런 제약이 없다면 그저 그러려니 할 텐데, 호기심과 기대감이 앞선다. 지난주 강풍으로 쓰러진 나무들이 등산로 곳곳을 가로막고 있다. 거의 한 시간쯤 걸었을까. 숲속의 작은 오두막집, Hut이 지붕 한 귀퉁이를 내보인다. 옛날 윌든의 단출하고 아담한 오두막 집이 반기는 듯하다. 그래 그때 그 시절,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윌든 통나무집. 하루 생활체험을 해보는 시간이다.
Hut에 여장을 푼다. 밖에는 비가 줄곧 내리고 있다. 우거진 녹색 숲은 생기가 깊어 보인다. 월요일 아침나절, 오가는 등산객은 없다. 비에 젖어서인지 약간은 으스스하다. 아내와 둘이서 벽난로 앞에 앉는다. 혹시나 하며 주위를 둘러봐도 마른 나무가 없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의 운치가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나무나 장작을 찾으러 밖으로 나가니 세상은 온통 젖어있다. 우선 비에 젖은 소나무 잎을 손으로 긁어모은다. 한 줌씩 손에 집어 물기를 터니 빨래 수건을 짜는 것 같다.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나뭇가지들도 줍는다. 벽난로에 들어갈 수 있게 작은 크기로 분지르는 소리, 벽난로에 불타오르는 정경을 그려본다. 한 아름 되는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벽난로 앞으로 옮기니 수북하다. 준비해온 신문지에 밑불을 붙이고 젖은 나뭇잎을 조금씩 올리자 검은 연기가 안개처럼 밀려 나온다. 고개 숙여 입으로 바람을 부니 조금 불이 붙다 꺼진다. 다시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도 허사다. 불이 붙었다가 꺼지고, 다시 시도… . 댓 차례의 시도 끝에 간신히 불기가 제법 일어난다. 매캐한 연기로 눈물이 찔끔하다. 옆에 있는 쓰레받이를 부채 삼아 부친다. 옛날 화전민들이 부싯돌로 불을 붙이는 모양새다. 뉴질랜드에 이민 와, 초기에 숲속 벽난로 있는 집에서 7년간 산 경험이 유효했던가. 아내에게 뭔가를 보여줘야 체면이 설 판이다.
7년의 경험이 모닥불 피우듯 손끝에서 일어난다. 드디어 굵은 나뭇가지나 등걸에도 활활 불이 붙는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어우러져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타오른다. 긴 나무 의자를 갖다 대고 둘이 앉아서 좀 편하게 시간을 두고 불을 쬔다. 말없이 벽난로만 쳐다보며 한참 동안 불을 쬐다 보니 온몸이 열기로 따뜻하다. 아내도 불타는 나무에 시선 집중이다. 젖었던 마음도 장작불 열기에 뽀송뽀송하다. 밖에 나가 나뭇등걸을 더 가져오니, 아내가 젖은 신발과 양말을 벗고 불을 쬐고 있다. 발을 뻗어 불 쬐는 자세가 어찌 좀 불편해 보인다. 한쪽에 있는 길다란 나무 의자를 갖다 벽난로 앞으로 옮겨 볼까. 그 위에 함께 발을 올려놓고 불을 쬐면 안성맞춤이려니. 젖은 발바닥, 넷이서 나란히 자세로 벽난로를 향한다. 후끈후끈하다. 양철 지붕 위에서 빗소리가 건반을 탄다. 후두두둑~ 벽난로 불길에서 들려오는 추임새 소리도 장단을 맞춘다. 투두두둑~ 바쁠 것도 없는 한적한 시간이다. 지붕 위 연통 굴뚝으로 연기가 낮게 깔리고 있다. 태곳적 세상이 조용히 내려앉듯 평온하다. 낯선 곳에서의 한나절, 온몸과 마음이 모처럼 자유롭다. 불현듯 벽난로 불길 속에서 타오르는 글자 몇 구절이 아슴아슴하니 빛을 발한다.
Not too much, Not too little, Just right ~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딱 알맞게 ~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기, 그런 순간에 젖어 드는 소소한 일상이 나를 보호하는 일이려니. 평일 하루 일손을 내려놓고 갖는 오붓한 시간, 밖에 비가 내려도 편안한 시간이다. Hut으로 들어서며 눈에 들어왔던 트램핑 입 간판의 안내문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병들지 않고 청정한 Kauri 숲을 보전하기 위한 결단이다.
Track closed for Kauri Protection!
앞으로 이어질 카우리 숲의 침묵, 청정 시간에 우리들은 무엇을 하지? 생생한 에너지 넘치는 카우리 숲 보전처럼 건강한 내 몸과 마음을 지키려면 어떤 결단이 필요할 듯도 싶다. 마음이 젖고 추운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Hut 벽난로 같은 풍경으로 살면 좋겠다. 나란히 쭉 뻗은 발바닥 들이 뜨겁다고 꼼지락 댄다.
글_백동흠
*백동흠 수필가:
2017년 19회 재외동포문학상 대상 수상
Birkenhead Transport 근무
글 카페: 뉴질랜드에세이문학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