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 3 St. Paul Cross-Cultural Ministry 윤성운 목사
1990년대 초반 시작된 점수제 이민으로 많은 한인들이 뉴질랜드에 들어 왔다. 그때 30대~50대였던 1세대들은 이제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 자리를 1.5세와 2세대들이 잇고 있다.< 교민신문>은 다음 세대를 준비한다는 뜻에서 ‘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라는 기획물을 연재한다. 뉴질랜드 각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가 그 대상이다. 독자들의 관심과 애독을 바란다. <편집자>
“제 ‘꿈의 무대’는 한 영혼의 마음속입니다” 한인 1.5세·2세와 다민족 선교에 관심…3년 전 찬양 CD 펴내
몇 달 전, 나는 아주 작은 기독교 집회에 참석했다. 거기서 한 목회자의 눈물을 보았다. 그는 기도 순서를 맡았다. 작고 여린 목소리로, 그는 외쳤다. 이 땅에 기독교 정신이 제대로 자리 잡기를 간절히 울부짖었다. 순식간에 젊은 목회자의 깊은 마음속 울림이 내게도 전해졌다. 어쩌면, 요즘은 보기 힘든 목회자의 눈물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를 다시 만났다. 훤칠한 키(182cm)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그리고 잘 차려입은 복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밤색 카디건에 청색 바지도 패션 모델처럼 훌륭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잘 생기셨네요. 그런 말 자주 듣지요?” “그렇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지만 사람은 외모를 보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잘 차려입으려고 노력합니다. 그게 또 사람을 만날 때 갖춰야 할 예의라고 생각하고요.”
버켄헤드 칼리지 시절 음악과 수영 즐겨 윤성운 목사.(영문 이름 Jeremy Yoon) 그는 1994년 2월, 유학생 신분으로 오클랜드에 왔다. 며칠 뒤 버켄헤드 칼리지(Birkenhead College)에 들어갔다. Year 10(Form 4, 한국의 중학교 3학년), 같은 또래의 한국 학생은 서너 명에 불과했다. 영어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고, 무엇을 희망으로 삼고 버텨내야 할지 막막했다. “Year 10을 한 해 더 다녔어요. 그때 사춘기가 찾아 왔는데 다행히 음악과 운동(수영)이 친구가 되어줘서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어요. 물론 어렸을 때부터 믿어온 기독교 신앙도 큰 힘이었지요.” 성운의 칼리지 학창 시절을 얘기할 때 ‘음악’을 떼놓고 할 수 없다. 그는 Year 11 때부터 재즈의 매력에 빠졌다. 학교 재즈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맡았다. 또 합창단에도 들어가 노래 실력을 뽐냈다. 기타는, 노래는 그의 앞날 사역을 위한 거름이었다. 또 하나는 ‘수영’. 학교 선생님들이 수영 선수가 되라고 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는 않았다. 갈 길이 따로 있다고 믿었다. 물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성운은 틈틈이 서핑 강사로도 일하고 있다. 6년 전에 시작해 3년 전 정식 자격증을 땄다.
바이블 칼리지(학사)·감신대 신대원(석사) 마쳐 성운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오클랜드대학 음대 작곡과에 입학했다. 무엇보다 자신 있는 분야였다. 그렇지만 얼마 안 있어 음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룩한 것을 추구하는 성운은 세속의 일들이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2학년 중반, 학업을 그만두었다. “중학교 때 꿈이 전도사였어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찬양 사역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대학교에서 배우는 것으로는 제 꿈을 이루기 힘들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있었고요.” 새 천 년이 시작되는 2000년, 성운은 오클랜드 서쪽 핸더슨에 있는 바이블 칼리지(현재 Laidlaw College)로 옮겼다. 1년 예비 과정을 마친 뒤 신학과(Bachelor of Ministry)에 들어가 3년을 더 공부했다. 졸업식 날 신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2007년 신학을 좀 더 공부한다는 계획에 따라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장신대, 총신대, 침신대, 감신대 등 유수 교단 신학교를 알아보다가 감신대로 마음을 정했다. 거기서 그는 신학 석사를 얻었다. 바이블 칼리지와 학풍이 비슷하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1.5세·2세대, 다민족 선교에 관심 많아 뉴질랜드로 돌아온 성운은 1.5세와 2세 그리고 다민족 선교에 눈길을 돌렸다. 1세대와 2세대를 잇는 그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일에 작은 힘이지만 보태고 싶었다. “미국 댈러스를 방문한 적이 있어요. 여러 목회자를 만났는데 그분들이 한결같이 말씀하는 게 있었어요. 2세, 3세들이 한때 교회를 떠났다가도 어느 정도 때가 되면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었어요. 결국, 자기는 한국 사람이고, 한인 교회 국밥이 그립다는 뜻이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제가 가야 할 길이기도 해서요.” 미국은 2세대, 3세대를 넘어 4세대로 가고 있다. 가까운 나라 호주도 3세대에 가깝고 뉴질랜드와 이민 환경이 비슷했던 캐나다도 2세대를 넘어서고 있다. 그만큼 배울 나라가 많다는 뜻이다. 성운은 이 점을 잘 헤아려 다음 세대 선교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성운이 생각하고 있는 뉴질랜드 영적 기상도가 궁금했다. 선교의 원산지였던 영국을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는 물론 영적 부흥이 수십 년 이어졌던 한국의 기독교도 요즘 들어 급격한 하락세를 피치 못하고 있다. 한때 전 세계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냈다는 뉴질랜드도 예외는 아니다. “죄성(罪性)의 경우, 성경에서는 한 가지로 얘기하는 것을 세상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풀어 얘기하지요. 심리학의 언어로, 철학의 언어로, 예술의 언어로 말이에요. 조금 어렵게 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목회자의 측면에서 봤을 때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어요. 저를 포함해 뉴질랜드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목회자들이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민족 선교 통해 하나님 나라 넓혀가 그 얘기 끝에 자연스럽게 목회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어떤 도움말을 해주고 싶으냐는 질문이 나왔다. 그는 자세를 가다듬고 좀 더 진지하게 말했다. “기쁘고도 어려운 길이지요. 그 무엇보다 복된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지만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잖아요. 이에 대한 철저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봐요. 현실을 외면하고 천국에만 머물러 있으면 자기는 좋을지 모르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아요. 그걸 분명히 알았으면 좋겠어요.” 한인 목회자로서 1.5세대와 2세대들의 복음을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그는 다민족 선교에도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월요일과 수요일마다 오클랜드 시내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선교 활동이 그 가운데 하나다. 성운은 세인트 폴 크로스 컬츄럴 미니스트리(St. Paul Cross-Cultural Ministry)의 지도자로 사역하고 있다. 2013년부터 시작된 이 사역은 키위, 폴란드, 대만 등 여러 나라 출신의 사역자들이 동참하고 있다. 주 사역은 명칭 그대로 다민족 선교다. 이 모임에는 오클랜드대학 학생, 유학생, 직장인, 노숙인 등 다양한 계층이 참석한다. 상당수는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다. 중동계 무슬림(시아파)이 자리를 함께 하거나, 얼굴을 내민다. 오클랜드가 아니었으면, 다민족 선교를 목표로 한 이런 모임이 없었으면 ‘복음’의 ‘복’ 자도 듣기 힘든 사람들이 많다.
나의 정신 없음을 회개하며 살아 서른일곱의 젊은 목회자 윤성운이 가진 앞날의 꿈이 궁금했다. “음악가(그는 3년 전 찬양 CD를 하나 냈다)들이 ‘꿈의 무대’라고 하는 곳이 있어요. 카네기 홀이나 애비 로드(Abbey Road, 비틀스가 앨범 재킷 사진으로 쓴 런던의 횡단보도) 같은 곳이죠. 그렇다면 성직자로서 하늘나라를 갈망하고 하늘나라를 품고 사는 나의 꿈의 무대는 어디여야 하는가를 자주 생각했어요. 그곳은 바로 ‘복음을 모르는 한 영혼의 마음속’이어야 한다고 믿어요. 그 꿈의 무대에 제대로 분명히 서겠다는 것이 제 꿈이에요.” 인터뷰 내내 조곤조곤 그러면서도 힘주어 말하던 그는 이런 고백을 했다. “요즘 들어 제 분노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고 살아요. 또 나의 정신 없음을 회개도 하고요. 과연 나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노숙자 등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을 제대로 돌보고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어요. 죄 없이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도 진지하게 합니다.”
그의 울음이 클수록, 하늘나라는 더 크게 웃을 것 제레미 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본받고 싶어 만든 이름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위해 울었다. 제레미 윤 목사는 뉴질랜드를, 한인 1.5세와 2세를 위해 울고 있다. 그의 울음이 더 클수록, 하늘나라는 더 크게 웃을 것이다. 3년 전 성운은 ‘엔드리스 러브…오브 갓’(Endless Love…of God)이라는 제목의 찬양 시디를 펴냈다. 표제곡인 <동구 밖 주님>의 마지막 가사로 이 글의 끝을 대신한다. “주님 날 가르쳐주소/ 주님 말씀 행하며/ 마른 동산 가꿔가도록/ 주님 날 가르쳐주소/ 아름다운 님을 따라 살도록.”
페이스북: www.facebook.com/jeremy.s.yoon
글_프리랜서 박성기 표지 사진_민트 스튜디오 |
[이 게시물은 일요시…님에 의해 2016-08-25 23:37:10 시사인터뷰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