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 7 Global Martial Arts 김정주 관장
“대한민국의 대표 무도, 태권도를 널리 알리겠습니다”
AUT에서 스포츠 학과 전공…나이든 관원 단증 땄을 때 자부심 느껴
대한민국 태극기와 뉴질랜드 국기.
벽 한쪽에 나란히 두 나라의 국기가 새겨져 있다. 대한민국과 뉴질랜드를 ‘빛나게’ 하려는 그 무엇이 있다는 뜻이다. 나도 모르게 두 국기를 보는 순간 잠시 숙연해졌다.
“하나, 둘, 셋.”
서툰 한국말이 새어 나왔다. 예닐곱 살 된 키위 꼬마애들이 발차기를 하며 지르는 소리다. 바짝 긴장한 아이들의 발동작이 사뭇 진지하다. 나도 모르게 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알바니에서 11년째 도장 운영해
김정주.
그는 알바니에 있는 글로벌 마셜 아트(Global Martial Arts) 관장이다. 여기서는 태권도, 해동 검도, 절권도, 킥복싱 등을 가르친다. 쉽게 말해 종합 무도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정주는 이곳을 11년째 운영하고 있다. 그를 거쳐 간 문하생만 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정주는 뉴질랜드 한인 1.5세대 가운데서도 앞선 세대다. 1975년생이니까 올해 만으로 마흔하나다. 얼굴은 동안이지만 말과 행동에는 중년의 진중함이 묻어 있다.
1990년 4월, 정주는 부모를 따라 뉴질랜드에 이민을 왔다. 한국에서 중학교 3학년을 한 달 정도 다니다 오클랜드 서쪽 그린 베이(Green Bay)에 있는 그린 베이 하이 스쿨에 Form 4(Year 10)로 들어갔다. 당시 학교에 아시안 남학생은 정주 하나뿐이었다.
“제가 이민 왔을 당시 오클랜드에 교민 숫자가 100명도 채 안 됐습니다. 한국 식당이 하나도 없었고, 누구에게 마땅히 정보를 물어볼 데도 없었습니다. 다들 이민 초창기였으니까요.”
사춘기 무렵 이민을 온 만큼 학교 영웅담(?)부터 풀어본다.
정주는 Form 7(Year 13) 때 학교 ‘싸움 짱’과 화장실 뒤에서 한판 결투를 벌였다. 상대방은 키가 2m에 가까웠고, 학교 럭비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결론은 정주의 ‘승’(勝). 태권도로 다져진 정주의 현란한 무도에 그 거구가 두 손을 들고 줄행랑을 쳤다. 그 뒤부터 정주는 친구들 사이에서 ‘새 짱’ 대접을 받았다.
Form 7 학년에 ‘50대 1’ 혈투로 신문 장식
또 하나의 영웅담.
1994년 정주는 셀윈 칼리지(Selwyn College)로 옮겨 Form 7을 한 해 더 다녔다. 거기서 그는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싸움 좀 한다는 남학생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오가는 ‘17대 1의 싸움’이 아닌, 무려 50대 1에 가까운 싸움이었다.
“사소한 시비로 키위 애와 싸움이 붙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50여 명이 달려들었습니다.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혈투를 벌였지요. 저는 이가 부러지고 얼굴 반이 뭉그러졌습니다. 그 일은 인종차별 문제로까지 확대됐는데 사실 그거는 아닙니다. 그냥 애들 싸움이 그렇게 비화한 것입니다. 신문에 크게 실렸지요. 며칠 지나 밖에 나가 보니까 저를 아는 사람이 많더군요.”
이 얘기를 하는 동안 정주의 표정 속에서 후회 같은 걸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정정당당한 싸움이었다는 말이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불의에 홀로 대항한 사춘기 소년의 의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정주는 다음 해 오클랜드대학 컴퓨터 사이언스 학과에 입학해 5년을 다녔다. 정주의 표현대로라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의무적으로 오대에 가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강산이 바뀐다는 10년의 반을 다녔는데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이십 대 중반에 다시 1년 과정의 피트니스 트레이닝(Fitness Training, AUT)을 마쳤다. 드디어 공부에 재미를 붙인 정주는 3년 과정의 바첼러 오브 스포츠 앤 레크리에이션(Bachelor of Sports and Recreation, AUT)에 도전, 졸업장을 받았다.
“대학 공부만 10년 가깝게 했습니다. AUT에서 제 적성을 찾았고, 그 뒤부터 계속 운동 관련 일을 해 왔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또 한 번쯤은 도전해 볼 만큼 멋진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꼭 운동 선수를 하지 않더라도 스포츠 에이전시 등 다양한 길이 있습니다.”
자신감 부족한 사람에게 잘 어울려
정주는 11년 전 자기 이름을 내걸고 도장을 열었다. 그 전에는 틈틈이 개인 교습을 하다가 한국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한 것이다.
“우리나라 무도와 문화를 알리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가 다섯 살 때부터 태권도를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요리를 아시안 요리사가 만든다면 조금 어색하듯이, 태권도 역시 키위들이 가르친다는 게 좀 그랬습니다. 그래서 태권도를 중심으로 한 도장을 연 겁니다. 중간중간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제는 내공이 생겼는지 버틸 만 합니다.”
현재 관원 숫자는 약 100명에 이른다. 처음 대여섯 명으로 시작한 것에 비하면 일취월장을 한 셈이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나는 사람을 꼽으라면 몇 해 전 태권도 단증을 딴 키위 아저씨다. 그는 칼리지에 다니는 아들을 따라 왔다가 얼떨결에 회원으로 등록했다. 내성적이고 겁이 많았던 그는 정주의 친절한 지도 덕에 단증을 거머쥐었다. 정작 아들은 실패한 단증을 환갑에 가까운 키위 아저씨가 딴 것이다.
태권도나 해동 검도 같은 무도는 누구에게 잘 어울릴까?
“누구보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왕따’나 두려움은 바로 자신감 결여 때문에 생깁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얘기하는 게 중요합니다. 무도는 바로 그걸 키워주는 운동입니다.”
정주는 또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데 있어 무도 만큼 좋은 게 없다고 강조했다.
“어린아이들이 발차기를 조금 더 잘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똑바로 앉아 있는 법, 제대로 서 있는 법을 먼저 가르칩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무도인으로 성장합니다.”
무도.(武道)
‘무사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이다. 이 도(道)를 가르치기 위해 정주는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도장을 지키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무도인 태권도에 대한 사랑이 깊다.
태권도 시범 필요한 곳 어디든 달려가
“한인회나 지역 사회 등 태권도 시범을 해야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갑니다. 제 고국인 대한민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뉴질랜드에서는 아직 인기 무도는 아니지만 제 힘을 다해 알리려고 합니다. 애정을 갖고 지켜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말을 할 때 정주는 목소리를 높였다. 정주는 제 한 몸 편하게만 살겠다고 마음먹으면 오랫동안 해 온 개인 트레이닝만 해도 충분히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표 무도인 태권도, 서른 해를 넘게 해온 태권도만 생각하면 검은 벨트를 다시 조이게 된다고 말했다.
정주가 갖고 있는 삶의 신조는 ‘익스플로어 언리미티드 포텐셜.’(Explore unlimited potential)이다. 한국말로 하면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하라’가 될 수 있다. 그는 관원들에게 이 말을 늘 강조한다. 아무것도 안 하거나 포기하면 성공 가능성은 0%다. 하지만 노력하면 0에서 1로, 1에서 5로, 5에서 20으로 올라간다. 그걸 가르치는 게 정주의 일이고, 정주 본인도 흔들릴 때마다 마음을 다잡게 하는 게 바로 이 신조라고 말했다.
정주의 도복 왼쪽에는 ‘마스터’(Master)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달인’, ‘대가’라는 표시다. 어느 한 분야에서 최고를 이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나이는 아직 많지 않지만 여러 무도에 능하다. 태권도 5단을 비롯해 해동 검도 4단, 합기도 3단, 특공 무술 3단 등 무술 단수의 합계가 20단에 이른다. 170cm가 조금 안 되는 작은 키에 몸무게는 65kg에 불과하다. 겉모습만 봐서는 무술인이라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도 빛나는 그의 눈빛에서,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에서 그 어떤 비범함을 느낄 수 있다.
무도는 포기하지 않는 것을 가르쳐
“남과 싸워 이기는 것에만 비중을 둬서는 안 됩니다. 무도는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든 무술인에게 포기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날마다 훈련을 쌓다 보면 삶에서도 자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게 ‘무’를 통해 ‘도’를 쌓는 일일 겁니다.”
정주는 나이 마흔이 넘었지만 아직 짝이 없다. 어쩌면 무도와 결혼을 했는지도 모른다. 한인 1.5세대 가운데서도 선배격인 그는 뉴질랜드에서 사반세기를 넘게 살면서 오로지 무도에만 전념해 왔다. 가장 격렬한 운동을, 가장 격렬한 방법으로 즐기며 사는 김정주 관장. 그를 보며 인생은 어쩌면 그 ‘한 방’ 때문에 짜릿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글_프리랜서 박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