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동포문학상 수상작-미운 오리새끼는 오리도 백조도 될 수 있다.
미운 오리새끼는 오리도 백조도 될 수 있다.
오의찬
어렸을 적에 우리 모두 한번쯤은 미운 오리새끼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미운 오리새끼는 다른 아기오리들과 달리 크고 못생기고 헤엄을 잘 치지 못하여 형제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하지만 미운 오리새끼는 사실 오리가 아닌 아름다운 백조였다. 미운 오리새끼가 따돌림을 받지 않고, 상처를 입지 않았다면 이 동화가 더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 않았을까? 아기백조가 아기오리들 하고 어울리며 형제처럼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나는 뉴질랜드에 사는 일본어를 공부하고 중국어를 구사하는 16살의 한국인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16년의 내 삶이지만 뉴질랜드와 한국을 오고 간 탓에 나는 나 자신이 그 어느 나라의 문화에 무지하지도 치우치지도 않는 문화적인 중립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전형적인 한국인과 같이, 나의 외국인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아몬드 모양의 외 까풀 눈을 가지고 있고 김치가 들어간 매운 음식을 즐겨먹으며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 때는 밤을 새며 태극전사들을 응원한다. 하지만 나는 내 또래 뉴질랜드 친구들처럼 이 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스포츠 중 하나인 Netball을 하고, 샌들을 질질 끌며 바다 보기를 좋아하며 럭비 월드컵 때는 항상 숨을 죽이며 All Blacks의 경기를 관람한다.
다양한 나라의 문화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뉴질랜드의 특성 덕분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뉴질랜드와 한국에 국한되지 않은 여러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중국의 발랜타이 데이라고 불리는 랜턴 페스티벌을 가고 매년 하루를 정해 학교에서 프랑스식 아침식사를 먹었으며 초등학생 때는 인도친구가 헤나를 그려주기도 했다.
나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했기 때문에 내 외국친구들에게 아름다운 빛깔의 나의 한복을 자랑하기도 했고, 맵지만 맛있었던 나의 김치 볶음밥을 나눠먹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한국에 관해서는 이곳에 살고 있는 다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한국에 가면 완벽하게 적응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떤 하나의 계기로 인해 나는 문화라는 것이 책에 써 있는 단순한 사실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광범위하다는 것과 내가 한국에 대해서 무지했던 부분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갓 14살이 되었을 무렵 엄마와 동생과 함께 한국을 방문 했다. 비행기에서 내리기도 전부터 나는 몇 년간 그리워했던 익숙한 풍경을 그리며 한시라도 더 빨리 한국에 도착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몇 년 만에 찾은 한국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경기도에 위치한 할머니 댁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난 오랜만에 찾은 나의 나라라는 생각으로 설레어 있었지만 그 다음 날 고모네 댁을 방문 하려 할 때부터 내가 한국에서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인지를 알 수 있었다. 버스를 타려 할 때도, 전철 표를 사려 할 때도 나는 사촌언니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는 매 순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문화적인 장애인”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내가 한국인이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어를 구사한다 한들 막상 한국에 가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화려하고 빠른 한국문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나는 내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
나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대한민국이라 불리는 우리 나라를 바라 보았고 내가 모르던 많은 것을 알아갔고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뉴질랜드에 비해 매우 싼값으로 많은 종류의 길거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포장마차가 신기했고 귀여운 노랑 모자와 옷을 입고 요구르트를 파시던 요구르트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외국에 잘 알려진 국제가수 ‘싸이’의 히트곡 ‘강남스타일’이나 ‘부채춤, 김치, 불고기’ 등 모두 자랑스러운 ‘우리 것’이지만 한국문화는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계기를 통해 나는 뉴질랜드에 와서 적응하지 못하는 한국유학생 친구들의 어려움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이상하고 납득이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것만 같았던 그들의 행동도 하나 둘씩 이해가 가고 오해가 풀렸다.
한국이랑 뉴질랜드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한 번은 한국에서 갓 온 유학생 친구와 같은 학교에 다녀서 친해진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같은 과학수업을 듣고 있는데 선생님의 농담에 그 친구가 정색하는 모습에 선생님께서 많이 무안해 하시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느 정도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선생님은 어른이고 존경의 대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 유학생 친구는 선생님을 어려워하여 후에도 선생님의 애꿎은 미움을 받았다. 잘 웃지 않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특성상 선생님이 실수를 하거나 농담을 던져도 대놓고 웃지를 못한다.
하지만 뉴질랜드에서는 누가 실수나 농담을 던지면 상대방이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예의다. 이 사실을 그 친구와 선생님이 알고 있어서 서로를 이해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끔 똑같은 행동도 한국에서는 예의라 칭하지만 뉴질랜드에서는 필요이상으로 자신을 낮추는 우스운 행위인 듯이 어떤 행동은 뉴질랜드에서는 일반적이지만 한국에서는 버릇이 없는 태도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작은 교민사회에서 한국을 전부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내 생각은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았던 것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식사 때 가족들과 함께 한국의 9시 뉴스를 시청한다. 우리 가족은 남북관계에 안타까워하고 기쁜 소식에는 함께 기뻐하고 슬픈 소식에는 그 누구보다 슬퍼한다. 우리는 뉴질랜드에 살지만 매일 아침 한국을 경험한다. 지도에 의하면 6240마일이나 떨어진 한국과 뉴질랜드의 땅. 이 거리만큼 한국과 뉴질랜드는 문화적인 차이도 크다. 하지만 매일 아침시간 30분 동안에는 한국에 계시는 할머니 댁의 TV로 밤 9시 뉴스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나는 아직 16살이지만 한국과 뉴질랜드를 오가며 여러 문화적인 차이를 보았다. 내가 14살 때 한국에서의 나의 문화적인 무능함과 함께 내 나라의 문화에 대한 무지함이 부끄러웠다. 나의 눈으로 바라본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빠르게 바뀌고, 화려한 대도시와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도 서울 시내의 웅장한 건물들을 생각하면 혼자 감탄할 정도로 한국은 크고 현대적인 곳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을 보낸 뉴질랜드는 한국과 대조적으로 큰 변화 없이 항상 같은 모습으로 이 곳에 남아있다. 문화에 관해서는 갑과 을이 없듯이 지금 한국의 모습과 뉴질랜드의 모습은 모두 각자의 개성에 따라 발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5000만 국민 중 하나이다. 그것은 내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났기에 내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특권이자 권리이다. 하지만 내가 조금 더 한국인다운 한국인이 되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나의 겉모습과 대한민국의 여권을 가진 것만으로 국한되지 않은 “진짜 한국인”이 되려면,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후천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의 나의 노력과 같이 한국에 관해 알고 싶어하고 한국의 문화를 항상 열정적인 자세로 받아 들인다면, 다음에 다시 한국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올 경우에는 내가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으로서의 삶에 쉽게 적응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한국에서도 뉴질랜드에서도 한 마리의 미운 오리새끼같이 비춰질 수 있다. 나는 오리새끼같이 생기지 않은 아기백조와 같이 대부분의 뉴질랜드 현지인과 같은 노란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진 서양인이 아니다. 또 정작 내 고향인 한국에서는 헤엄을 잘 치지 못했던 아기백조같이 한국문화를 완전히 이해하고 동화되어서 혼자 생활하기에는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내가 정말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한국인인 것과 같이, 뉴질랜드에 갓 온 한국친구들도 뉴질랜드 문화를 인정하고 받아 들이면 그들도 모두 뉴질랜드 현지인과 격의 없이 어울릴 수 있는 형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미운 오리새끼는 오리도 백조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