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08); 행복이 넘치는 교회(7) 라오디게아교회 <요한계시록 3:14~22>
라오디게아는 지난 주에 보았던 빌라델비아에서 동남쪽으로 약 7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주 부요한 도시입니다. 이러한 부요한 도시에서, 로마 정부의 큰 간섭도 없이, 우상숭배의 강요도 없이,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은 편안한 신앙생활을 이어갑니다. 재정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었고, 박해나 핍박 없이, 그야말로 신앙생활하기 좋은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교회가 오히려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에 가장 안타까운 교회로 기억됩니다. 모든 교회 중에 유일하게 칭찬은 없고, 책망만 받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좋은 환경 속에서, 왜 라오디게아교회는 칭찬이 아닌 책망만 받는 교회가 되었는가? 오늘도 말씀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춰보면서, 이를 통해 내가 깨달아야 할 은혜는 무엇인가? 어떤 믿음의 삶을 살아 칭찬받는 성도로, 우리 교회로 세워갈 것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분명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라오디게아는 두 도시의 물을 토관으로 연결해서 끌어다가 사용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히에라볼리의 온천물입니다. 본래 온천이라 뜨거운 물인데, 토관을 타고 10킬로미터 정도 흘러오다보면, 미지근해집니다. 석회질이 많은 물이라, 마시기라도 하면 몸에도 좋지 않고, 금새 구토가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미지근하여 토하여 버린다.”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어서 골로새에서 흘러오는 물은 만년설이 녹은 물입니다. 얼마나 차가운지 한 번 마시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시원한 물입니다. 그런데 이 물도 토관을 타고 16킬로미터 정도를 흘러오면, 그 차가운 것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을 예로 들어서 교훈의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들이 히에라볼리에서 흘러내려와 식은 물처럼, 골로새에서 흘러내려와 찬기운을 잃어버린 물처럼,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구나. 나는 너희들이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한다.”
물론 본문에서는 “차든지 뜨겁든지 해라.”고 말씀하셨기에, 어떤 이들은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왜 예수님은 “차든지 뜨겁든지”라고 말씀하면서 헷갈리게 하실까요? 자, 보세요. 지금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본문에서 어떻게 표현합니까? 한마디로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상태가 언제인줄 아십니까? 미지근한 상태입니다. 사실 신앙생활도 기복이 있잖아요. 어떨 때는 아주 뜨겁고, 어떨 때는 또 차갑기도 합니다. 그럼 스스로 압니다. 내가 은혜충만하고 그럴 때는 내 신앙이 지금 한창 뜨겁다는 걸 압니다. 반대로 교회 가는 것도 싫고, 말씀을 받아도 마음이 냉랭하고 그러면, 내 신앙이 지금 너무 차가워져서 문제가 있다는 걸 압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스스로 압니다. 그런데 미지근하면 모르는 거예요.
저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차가워라. 차라리 냉랭해라. 그래서 너 자신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더 낫다.” 뜨겁지 못할 바에는 아예 차가워서, 자신의 차가워진 신앙을 깨닫고 빨리 돌이킬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차가워져서 정신을 차리든지, 아니면 얼른 회복해서 뜨거운 모습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한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신앙으로, 확실한 신앙으로, 뜨겁게 주를 사모하고, 뜨겁게 기도하고, 뜨겁게 말씀을 붙잡고, 뜨겁게 성도들간에 서로 사랑하며, 뜨거운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믿음의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17절 말씀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 도시는 지진으로 피해가 있었어도,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물이 없어도, “그럼 토관으로 물을 끌어오면 되지 뭐.” 그 시대에 관을 만들어서 물을 끌어들입니다. 내 힘으로 다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환경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생각에 젖어들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려움이 있으면, 내 돈으로 해결하면 되는 거예요. 문제가 생기면 내 지식으로 풀어보면 되는 거예요. 굳이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할 것도 없습니다. 부르짖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신앙은 있으니까, 교회는 나오죠. 말씀은 듣죠. 기도는 하죠. 하지만 다 형식만 갖추어진 뜨뜻미지근한 신앙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가, 나라와 인종과 국적을 불문하고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8절에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연단한 금 – 내 신앙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정결한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흰 옷 – 내 죄를 씻어버리고 깨끗한 모습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안약 – 영적인 눈을 고쳐서 바른 믿음의 시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무엇보다 나 자신을, 나 자신의 믿음을, 신앙의 상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믿음의 시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시선과 사람의 생각으로, 더불어 사람의 방법으로 하는 것은 사사기의 시대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하지만 정결함으로, 깨끗함으로, 믿음의 시선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의 도우심의 손길을 의지하는 것, 주의 인도하심의 손길을 의지하는 것은 천국의 시민권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믿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또한 본대로 행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본문의 말씀을 받는 대상이 누구인가요? 불신자인가요? 전도대상자인가요? 아니죠.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은 불신자를 향한 전도의 메시지라기 보다, 이미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의 영적인 성숙을 위한 결단의 요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신, 어떤 면에서 보면 일방적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 즉 구원 받은 이후의 삶은 우리의 자발적인 헌신과 결단, 이를 통한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가는 삶이어야만 합니다.
또한 여기서 함께 먹는다는 것은 “너와 내가 비로소 한 가족이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족을 말할 때 다른 말로 뭐라고 합니까? “식구”라고 하죠. 함께 먹는다는 것은 먹고 배부르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오늘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것도 이겁니다. “네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데, 이제 정말 내 가족이 되어야 하지 않겠니?” 지금까지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은, 아니 우리들은 구원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믿는 자는 늘 복 받고 평안하기만 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살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작은 고난에도 넘어지고, 사명 앞에 주저하고, 미지근한 신앙의 모습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이요, 오늘날 모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제 정말 내 가족이 되지 않으련? 내 자녀로서 뭔가 다른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니?” 애타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 속에 담긴 주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주를 위해 헌신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