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75) 간절함으로, 사모함으로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75) 간절함으로, 사모함으로 <창세기 32:24~32>

뉴질랜드에는 세 가지 키위가 있죠. 하나는 뉴질랜드인들을 키위라고 하고, 또 하나는 과일 키위가 있고, 마지막 하나는 키위 새입니다. 그런데 키위라는 이름의 원조는 새부터 시작합니다. 마오리인들이 키위새를 보면서, “키위 키위”하고 운다고 해서 키위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키위라는 과일은 1904년에 중국에서 들여와 재배를 시작했습니다. 이 과일의 모양이 키위새가 움츠리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키위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그럼 뉴질랜드인들은 왜 키위가 되었을까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호주 군인들이 뉴질랜드 군인들을 보면서, 키위라고 부르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키위새는 날개가 퇴화되어 날지 못하기에 오직 뉴질랜드에서만 서식합니다. 그러다보니 뉴질랜드인들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없는 거죠. 그럼 키위새는 새인데도 불구하고 왜 날지를 못하는 걸까요? 뉴질랜드의 자연환경이 너무 좋고, 천적이 없어서 날 필요가 없었다고 하죠. 그래서 뉴질랜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막 도전적이고, 열정이 넘치고, 변화를 추구하고 그런 쪽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뭔가 뜨겁게 기도하고, 간절히 사모하고, 그런 모습들은 조금 부족해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인 야곱의 얍복강 기도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키위새의 퇴화된 날개가 떠오르더라구요.  우리는 내 신앙과 삶의 평안함 속에서 혹 주를 향한 간절함과 사모함을 너무 잊어버리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요? 세상의 환경과 바쁨과 여러가지 일들 속에서 주를 향한 갈급함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닌지요? 바라기는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기대감이 있기를 원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올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더불어 웨슬리회심성회와 같은 특별집회 때에 큰 기대감을 가지셔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 기대감을 가지고, 간절함으로 사모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올 때에, 나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야곱, 그를 인간적으로 신앙적으로 본이 될만한 인물이라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고, 체험하였고, 누렸습니다. 어떻게요? 간절함으로, 사모함으로. 그럼 야곱이 가진 간절함과 사모함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립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이십년간 삼촌 라반의 집에서 도피생활을 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겪은 일입니다. 야곱의 이십년간의 삶은 도피생활이었지만, 보여지는 모습만 보면 사실 금의환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네 명의 아내와 열 한 명의 아들을 거느렸습니다. 아직 베냐민은 낳기 전이죠. 재산은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오늘 중요한 건 이게 아닙니다. 본문의 시작을 보십시오. 24절입니다. 중요한 말씀은 이겁니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야곱이 지금 홀로 남은 것은 야곱 스스로 자처한 일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와 씨름을 합니다. 이게 뭔가요? 기도입니다.우리가 야곱하면 생각하는 것이 뭔가요? 축복이죠.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그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했던 야곱이 하나님을 찾아가 기도하는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누리길 원했으면, 먼저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을 터인데, 야곱이 먼저 하나님을 찾아가서 기도하는 적이 없습니다.   


그간의 야곱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것 같긴 하였으나, 정작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야곱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강을 건너보낸 후에, 홀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씨름을 하는 것처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그 일생에 처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간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하지 못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건너보내고, 홀로 남았을 때, 그때 야곱은 정말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속에서 야곱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사람 저 사람과의 관계, 경제적인 문제들, 그 모든 것을 다 건너편으로 떠나 보내고, 홀로 남았을 때에,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를 막아섰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정말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홀로 남았더니”와 같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홀로 남겨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홀로 남아 주님 앞에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시간, 주님과의 친밀함의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사모함을 가지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사람, 상황, 문제, 다 내려놓고, 홀로 남아 주님만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과의 영적 친밀함을 체험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내 삶이 달라집니다. 


밤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하던 천사는 이제 떠나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은 천사를 붙잡고 말하죠.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렇게 축복만을 따라서 살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또 그렇게 축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야곱이 구하는 축복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복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야곱에게 먼저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야곱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 뒤꿈치를 잡은 자”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 자체는 남을 속여서라도, 남을 넘어뜨려서라도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시기 전에 먼저 지금까지 가지고 살아왔던 야곱 자신의 이름, 자신의 삶의 모습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새이름을 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이 어떻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나요?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전까지의 야곱이 남의 발뒤꿈치를 잡아서라도 복을 받고자 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얍복강에서 기도하는 야곱은 진실로 하나님의 복을 받고자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지는 모습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게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이름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야곱의 습성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세겜 도성에서 디나가 수치를 당한 이후에, 벧엘에 오른 야곱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내 삶이 다 변화되는 게 아니죠. 이신칭의 – 믿음으로서 의롭다 여김 받았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정말 의로운 삶으로 완전히 바뀌는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성화의 걸음을 걸어가도록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늘 스스로 새롭게 결단하잖아요. “내가 예수 믿는 자인데,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인데, 이렇게 살면 안돼. 이렇게 살아가야 해.”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을 우리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심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이름을 주신 주의 은혜를 기억하며, 날마다 간절함으로, 사모함으로 주님 더 닮아가는 삶의 변화를 이루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영적인 흔적이 새겨집니다. 


밤새도록 씨름하던 야곱은 영광의 상처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보통 야곱의 씨름을 기도로 해석을 합니다. 아마도 야곱은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밤새도록 몸을 뒤틀면서 기도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는 중에 아마도 골반뼈가 빠져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야곱은 평생 정상적인 걸음을 걷지 못합니다. 야곱은 걸을 때마다 하나님께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던 그 때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도 무언가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잖아요. 때로 몸에 어떤 상처가 나면, 볼 때마다 언제, 왜 다쳤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존 웨슬리회심 기념주일로 예배를 드렸는데, 웨슬리의 회심사건도 이와 같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올더스케잇 거리에 있었던 일은 영적인 흔적이 깊이 새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야곱에게 얍복강은 야곱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어지는 영적인 흔적이 새겨진 곳이 되었습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평생을 절게 만든, 야곱의 몸 자체에 하나님의 만지심을 통한 영적인 흔적이 새겨졌습니다. 야곱은 그 몸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야곱은 세월이 흘러 애굽에서 살아갈 때에, 죽음을 앞둔 그 시점에는 지팡이를 집지 않고서는 일어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지팡이를 의지하여 일어섭니다. 그리고 그때도 변함없이 야곱은 떠올렸을 것입니다. 얍복강에서 자신의 몸에 영적인 흔적이 새겨지던 그 순간을 말이죠.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영적인 흔적이 새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전에 새겨진 영적인 흔적이 있다면 잃어버리지 말고 잘 기억하십시오. 혹 그런 체험이 없다면 기대감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간절함으로, 사모함으로, 예배의 자리에 설 때에, 주의 말씀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때에, 주신 사명 감당하며 나아갈 때에, 이번 특별집회에 참여하실 때에,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한 영적인 흔적을 새겨주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일평생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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