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39 올 블랙스 럭비 선수 - 콜린 미즈 (Colin Meads)
1936년 6월 3일~2017년 8월 20일>
한 세기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한 '럭비의 전설'
콜린 미즈가 ‘20세기 뉴질랜드 럭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이유는
그보다 더 럭비 팬의 가슴을 설레게 한 선수가 없어서다.
볼 다루는 기술에 동료 선수들이 놀랐고, 그를 태클해야 하는
상대방 선수는 피해갈 수 없는 장벽에 혀를 내둘렀고,
터치 라인을 향해 무소의 뿔처럼 매섭게 질주하는 모습을 보며
럭비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럭비 본고장 영국에서는 럭비 월드컵이 한창이다.(2015년 10월 지금) 뉴질랜드 럭비 대표팀, 올 블랙스(All Blacks)는 조별 리그 네 경기를 가뿐히 이기고 8강 전에 올랐다. 1987년 제1회 대회, 지난 2011년 뉴질랜드에서 치러진 제7회 월드컵 우승에 이어 또다시 우승컵을 기대하고 있다.
뉴질랜드 국민 스포츠인 럭비에 온 국민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든 키위의 눈과 귀가 럭비 월드컵에 몰려있다. 뉴질랜드 스포츠의 자존심, 럭비를 통해 비록 나라는 작지만, 스포츠 파워는 어느 나라보다 강하다는 점을 만방에 보여주고 싶은 까닭이다.
뉴질랜드 럭비 국가대표팀 올 블랙스 출신인 콜린 미즈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번 월드컵이 더 흥미롭게 느껴지리라 믿는다.
콜린 미즈가 '뉴질랜드 럭비의 시작'
콜린 미즈는 ‘뉴질랜드 럭비의 전설’이다. 럭비 전문가들은 그를 일컬어 “뉴질랜드 럭비의 시작”이라고까지 한다. 그는 ‘20세기 뉴질랜드 럭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로 뽑혔다.
콜린 미즈는 1936년 6월 3일 케임브리지(Cambridge, 북섬에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일곱 살 때 온 식구가 시골로 들어가 양 목장을 했다. 그곳에서 미즈는 뒷날 세계 럭비를 놀라게 할 기본 체력을 만들어냈다.
양치기 소년 콜린 미즈는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근력을 키워나갔다. 두 손에 양 한 마리를 움켜쥐고 뛰었다녔다고 한다. 동생 스탠 미즈(Stan Meads)와 함께 100 에이커(12만 평) 땅을 초지로 만들었다.
올 블랙스 선수들이 다 그렇듯이 콜린 미즈 역시 초등학교 때부터 럭비 선수로 뛰었다. 스무 살에 럭비 선수로는 가장 높은 명예인 올 블랙스 명단에 당당히 올랐다. 데뷔는 시드니에서 열린 호주전이었다.
이 경기에서 콜린 미즈는 종횡무진 활약했다. 192cm에 100kg이 넘는 큰 몸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를 꺽을 적수가 없었다. 포지션은 주로 키가 큰 선수가 맡는 ‘록’(Lock, 스크럼 두 번째 줄의 선수)이었다. 소나무처럼 우뚝 서 있다고 해서 ‘파인트리’(pine tree)라는 별명이 붙었다.
콜린 미즈는 약관 스무 살에 치른 호주전을 시작으로 1971년 서른다섯 살에 올 블랙스를 떠나기까지 모두 133번 경기를 치렀다.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최다 게임 출전 기록이었다. 트라이(Try, 5점)는 스물일곱 번 해냈다.
콜린 미즈가 나타난 뒤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아
콜린 미즈가 막 선수 생활을 하던 시절만 해도 뉴질랜드 럭비는 키위들한테 전폭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맹활약하면서 럭비는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됐다. 뉴질랜드 럭비 역사를 ‘콜린 미즈 앞과 뒤’로 나누는 이유다.
콜린 미즈가 올 블랙스 선수로 활동하던 15년 동안 상대 팀 선수가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농장 일을 하면서 단련한 몸은 무시무시한 병기에 가까웠다. 몸싸움을 하다가 상대방 턱뼈를 부러뜨리고 사타구니를 심하게 다치게 했다. 콜린 미즈 역시 머리 상처를 입는 등 만만찮은 쓴맛을 맛보았다. 1970년 남아공에서 벌어진 경기에서는 팔이 부러지고도 붕대 하나만 걸치고 투혼을 불살랐다.
‘콜린 미즈’하면 자주 나오는 얘기 가운데 하나.
한창 경기를 하다가 상대방 선수가 심판에게 항의했다. 그는 자기네 편 선수가 한 사람 부족하다고 말했다.(럭비는 15명이 하는 운동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안 심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그 선수 왈, “콜린이 우리 선수 하나를 먹어 치웠다.”
콜린 미즈가 ‘20세기 뉴질랜드 럭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이유는 그보다 더 럭비 팬의 가슴을 설레게 한 선수가 없어서다. 볼 다루는 기술에 동료 선수들이 놀랐고, 그를 태클해야 하는 상대방 선수는 피해갈 수 없는 장벽에 혀를 내둘렀고, 터치 라인(Touch Line)을 향해 무소의 뿔처럼 매섭게 질주하는 모습을 보며 럭비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동생도 올 블랙스 선수로 경기장 누벼
동생 스탠 미즈도 형과 함께 올 블랙스 선수로 경기장을 누볐다. 스탠 미즈는 모두 서른 게임에 출전했다. 그 가운데 열한 게임에서 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스크럼을 짰다.
콜린 미즈는 다섯 자녀를 두었다. 그 가운데 둘은 아버지의 스포츠 정신을 이어갔다. 딸 론다는 뉴질랜드 네트볼 국가대표 실버 펀(Silver Fern) 선수였고, 아들은 킹 컨트리(King Country, 북섬 서쪽 지역으로 높은 언덕이 많다) 럭비 선수로 뛰었다. 아들 별명이 재미있다. 아버지가 소나무(pine tree)라 아들은 자연스럽게 ‘솔방울’(pine cone)이 됐다. 솔(소나무) 부자(父子)였다.
올 블랙스에서 물러난 콜린 미즈는 자기 고향 킹 컨트리에서 2년 더 선수로 뛴 뒤 그곳에서 후배들을 키웠다. 올 블랙스 선발위원회에서 봉사했으며 매니저로 돕기도 했다.
콜린 미즈가 평생 키위에게 보여준 럭비 사랑은 ‘진짜 럭비’가 무엇인지 잘 말해 주고 있다. 스포츠에도 참단 과학을 적용하면 더 멋진 경기를 치를 수 있다는 것을 지금은 모두 당연하게 생각한다. 콜린 미즈는 그 이론과는 정반대를 주장했다. 첨단 과학을 활용한 프로보다 순수 아마추어가 제일 좋다고 보았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 그대로 한판 ‘맞짱’을 뜨는 것이 진짜 스포츠라는 뜻이었다.
언제나 ‘정직한 스포츠’ 주장해
시계를 돌려 1979년 6월 3일로 가보자. 그날 남섬 오타고(Otago) 선술집에서는 몇몇 럭비 팬이 한자리에 모여 올 블랙스를 응원하고 있었다. 아니 콜린 미즈 때문에 모였다고 하는 것이 맞다.
콜린 미즈의 럭비를 사랑하는 팬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이를 따지지 않고 수십 해 동안 전통으로 지키는 게 있다. 등 번호 5번(현역 선수로 뛸 때 번호)을 새긴 저지(Jersey, 운동복)를 입고, 머리에는 헤드기어(Head Gear, 머리 보호대)를 쓰고, 손에는 팬들에게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전기 '콜린 미즈 올 블랙'(Colin Meads All Black)을 들고 그렇게 ‘소나무 한 그루의 꼿꼿함’을 칭송하는 일이다.
럭비 월드컵을 지켜보고 있는 많은 키위가 지금 제2의 콜린 미즈를 기대하고 있다. 뉴질랜드 럭비의 전설인 콜린 미즈, 그 역시 킹 컨트리 목장에서 포도주 한 잔을 마시며 올 블랙스를 향해 뜨거운 응원을 보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글_박성기
*제8회 럭비 월드컵은 뉴질랜드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올 블랙스는 숙적 호주를 상대로 한 결승전에서 34대 17로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