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의 아모르파티 9 ; 물꼬

교민뉴스


 

백동흠의 아모르파티 9 ; 물꼬

일요시사 0 708 0 0

‘스~윽~’


책을 읽다가 와 닿는 글에 연필로 밑줄을 긋는다. 눈길이 머물러 쉬어가는 신호다. 한 장을 읽는데도 여러 군데서 멈칫한다. 마음마저 꽉 차오르며 뿌듯한 느낌, 정말 귀한 사람을 만나서 이야길 듣는다.


간결하고 편안하면서도 남는 게 있는 글이면 좋은 친구를 만난 듯이 반갑다. 바쁜 가운데서도 짬짬이 시간을 내서 읽는 즐거움이 따로 없다. 읽어도 밋밋한 책이 있는데, 살갑게 여기저기 밑줄을 긋는 책으로 남아서 고맙기까지 하다. 밑줄 친 곳 중에서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면은 위쪽 모서리 부분을 살짝 접어둔다. 다음에 보고 싶을 때 쉽게 보기 위해서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니, 접어둔 모서리 부분이 잘 익은 찐빵처럼 부풀어 올라있다. 거기서 나오는 향긋한 설렘이 코끝을 간질인다. 접어둔 책갈피가 세상과 소통하는 물꼬 같아 가슴이 훈훈하고 넉넉하다.


책과 마찬가지로 밑줄 긋고 싶은 사람이 있다. 만나서 밥을 먹기도 하고, 함께 일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느낌이 다양하다. 책을 읽는 여운으로 남아서일까. 다시 읽고 싶은 책처럼 만나고 싶은 사람은 좋은 책으로 다가온다. 스마트폰 연락처에 수많은 이름이 있는데, 자연스레 손이 가는 번호가 있다. 다시 꺼내 읽고 싶은 책이다. 수십 년을 이어온 만남은 고전으로 남는다. 최상의 골동품인 셈이다. The best antique is the old friend.


책장 앞에 서서 눈길을 건넨다. 다시 꺼내 읽고 싶은 책이 어디 있나? 우쭐대지 않고 수굿하게 있는 녀석이 하나 눈에 띈다. 한쪽 구석에 자리한 녀석의 머리, 모서리가 한껏 부풀어 있다. 꺼내 집어 드니 오래된 녀석이다. ‘나중에 온 이들에게도’. 영국의 사상가, 존 러스킨이 쓴 책이다. 인도, 간디가 열차 여행 중, 이 책을 읽고서 감동하여 새로운 나눔 운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포도원 일꾼의 품삯’에 대한 비유를 다시 비춰본 것이다. 사람은 모두 일할 자격이 있고, 그 몫으로 대가를 받을 자격도 주어졌다. 일꾼들이 일찍 왔거나 늦게 왔거나 모든 일꾼에게 주인은 품삯을 고르게 주었다. 주인의 관대함처럼 자산가들에게도 그러하길 바라는 내용이었다. 비교하지 말고 심판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나중에도 못 오는 이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지난 저녁, 기도 봉사 단원들이 월남 국수 집에 모였다. 겨울의 뒷자락에서 꽃샘추위도 달랠 겸 만든 시간. 빙 둘러앉아 회식하는 자리. 펄펄 끓는 육수에 신선한 야채와 해물 거리를 넣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홍합, 꽃게, 꼴뚜기, 다시마… . 보글보글 끓는 소리만큼 이야기도 무르익어갔다. 처음처럼 소주와 진저 비어가 뒷맛을 흥건하게 우려냈다. 맏형 격인 선배나 막내 위치의 후배를 비롯해 모두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했다. 서로 나누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음에 좋은 여운을 남겼다.


‘요즘, 일을 많이 하는데도 피곤치 않고 마음이 편안해요. 고맙기도 하구요.’ 막내 이야기에 맏형이 화답했다. ‘아이들 분가시키고서 아내와 둘만 있으니 조촐하고 가벼워. 순하게 사는 맛에 평화가 이런 것인가 싶어.’ 삶에 충실하면서도 편안한 여유를 가지고, 현재의 여건을 고맙게 느끼며 사는 모습이 은총일 터. 매주 함께 모여 기도하고 나눔을 갖는 생활이 서로를 돌아보는 거울 같았다. 세상에 바라는 것에서 한 발짝 떨어져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독이는 시간이 홀가분했다.


굴절 많은 하루 일을 마친 뒤, 창가 테이블 앞에 앉아 우두커니 바깥 풍경을 내려다본다. 추억할 수 있는 책 한 권에 숭늉 같은 커피 한 잔. 글 향기가 그윽하고 잔잔하다. 접어둔 책갈피 모서리처럼, 조금은 두툼한 촉감에 위안을 얻는다. 나뿐 아니라 다른 이의 기억에도 편안하게 남는 물꼬 같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큰 부(富)와 명예를 얻어 성공한 이로 알려진 이가 한 말이 귀에 뱅뱅 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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