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77) 능력의 손으로 붙드시는 하나님 <열왕기하 2:6~14>
1875년 시카고의 한 빈민가에 교회를 설립하고, 미국 복음주의 운동의 선두 역할 했던 D.L.무디는 모세의 생애를 설교하면서, 세 단계로 구분해서 말합니다. 첫째는 ‘Something’의 단계로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입니다. 두 번째는 ‘Nothing’의 단계로 모세가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서 40년간 양을 치는 목자로 있을 때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Everything’의 단계로 그의 인생의 절정기입니다. 모세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런 단계를 거칩니다. ‘Something, Nothing, Everything’. 다들 처음에는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대단한 존재로 스스로 생각합니다. Somthing. 그러다가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 내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Nothing.스스로의 연약함을 깨달은 뒤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능력의 손으로 붙드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Everything –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엘리야의 모습을 보았죠.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Nothing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쉼을 주시고, 먹을 것을 먹이시고,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붙드시사 마지막 사명을 맡겨주십니다. 세 가지 사명이 있었죠. “아람 왕을 세우고, 이스라엘 왕을 세우고.” 마지막 하나는 “네 뒤를 이을 선지자를 세우라.” 오늘 본문은 마지막 세 번째 사명,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 엘리사를 세우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냥 엘리사가쓰임받게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포함한 2장 전반부의 모든 말씀들은,엘리사의 자격 검증을 위한 시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엘리사가 어떤 시험의 과정을 거쳤는가? 우리도 능력의 손으로 붙드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지난주에도 보았지만, 엘리야는 참 많이 돌아다닙니다. 오늘 마지막 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엘리야는 마지막 승천을 앞두고, 바쁘게 돌아다닙니다. 벧엘에 있는, 또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 학교를 순회하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한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요단에 이르러서 본문 11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불수레와 불말과 함께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하게 됩니다. 엘리야가 승천한 곳으로 알려진 곳은 지금의 요르단 땅입니다.
엘리사는 끝까지 엘리야를 따라갑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부름을 받은 이후에, 엘리야 곁에서 계속 수종을 들면서 제자로 훈련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엘리야의 승천을 앞두고 엘리야를 바짝 따라다닙니다. 엘리야는 계속해서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니, 너는 여기에 있어라.” 여리고를 갈 때에도 요단으로 갈 때에도 동일하게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있어라” 이 모든 엘리야의 요청에 엘리사는 똑같이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오늘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시험이 바로 이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켜가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주님 안에 거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지난 주에 말씀드렸죠. 엘리야가 낙심된 마음을 가졌지만, 그럼에도 엘리야가 잘한 것이 무엇인가? 어쨌든간에 하나님 앞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엘리사도 마찬가지예요. 엘리사는 끝까지 엘리야 곁을 지킵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어쨌든간에 지켜가고 있습니다. 이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지막 훈련을 감당해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배해야 하는 그 자리, 내가 봉사해야 하는 그 자리, 내가 사명 감당해야 하는 그 자리를 끝까지 잘 지켜야 합니다. 그게 믿음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말씀하죠.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예수님께서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내 신앙의 자리를 견고히 지켜 나아갈 때에, 능력의 손으로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고, 또한 맡기신 사명 넉넉히 감당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가장 귀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 나눈대로엘리사는 열심히 엘리야를 따라나섭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엘리사를 향해 엘리야가 묻습니다.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그러자 옐리사가 대답합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 성령의 역사를 구합니다. 이에 엘리야가 대답하죠.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엘리야만큼 되는 것도 힘든 일인데, 그보다 갑절을 구하는 게 욕심이 과한거죠. 그럼에도 이어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질 것이다.”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끝까지 붙어서 엘리야의 승천을 바라보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자, 그럼 엘리사가 구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었을 터인데, 왜 굳이 갑절의 영감을 구했을까요? 삼일교회의 송태근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고 옥한흠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야! 너희들은 참 힘들겠다. 우리 때는 목회가 단편적이었는데, 두고봐라. 너희 때는 목회의 문제들이 아주 입체적이 될 거다.” 뭔가요? 세상이 달라진다는 거예요. 점점 힘들어진거라는 거예요.목회만 그런가요? 사업장은 어떤가요? 직장은 어떤가요?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그런데 지금이 제일 힘들까요? 아니죠. 우리 다음세대는 더 힘들 것입니다. 오늘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구한 것이 이런 까닭입니다. 이제 엘리야의 시대보다 더 큰 능력이 있지 않으면, 더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지 않으면, 더 하나님께서 단단히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도 주의 사명 감당하는 중에 죽기를 구하는데,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엘리사는 앞으로 더 힘겨워지는 상황을 바라보았습니다. 동시에 엘리야에 비하면 너무나도 부족한 자기 자신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면서 구하는 거예요. “하나님! 엘리야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보다 갑절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제가 겨우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지금 가장 귀한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가장 귀한 것을 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구하는 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구하는 것이 내게 임할 때까지 끝까지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능력의 손으로 붙드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으시다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임하는 직접적인 통로가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지금 나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끝까지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때에 가장 선하신 것으로 응답해주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가장 귀한 것을 구하고, 가장 귀한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끝까지 엘리야 곁에 있던 엘리사는, 11절에 이제 어쩔 수 없이 엘리야와 떨어지게 됩니다.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태워 하늘로 불러올라갔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엘리사는 이렇게 외칩니다. 12절 중반입니다.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여기서 아버지라는 말은 영적 스승인 엘리야를 아버지처럼 높이는 표현이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라는 것은 엘리야의 그간의 모든 사역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영적인 타락으로부터 보호받아왔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오늘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외친 이 말은 나중에 엘리사도 똑같이 듣게 됩니다. 열왕기하 13장 14절에 가면 엘리사가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때 문병을 온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엘리사를 향해 외칩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스승 엘리야의 승천을 바라본 엘리사는 홀로 그 길을 다시 돌아옵니다. 엘리야는 승천하고, 엘리사는 홀로 남겨집니다. 이어 엘리사는 자신의 옷을 찢고, 대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옵니다. 여기서 엘리사가 자신의 겉옷을 찢은 것은 일차적으로는 슬픔의 표현입니다. 대신 엘리야의 겉옷을 주워가지고 나옵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죠. 엘리사가 자신의 겉옷을 찢은 것은 슬픔의 표현인 동시에, 이전까지의 자신의 모든 삶을 벗어버린 것입니다. 이어서 엘리야의 겉옷을 주워가지고 오는 것은 이제부터 앞선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자로 새롭게 사명의 자리로 선 것을 의미합니다.그러니까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칠 때에, 엘리야가 행했던 물이 갈라지고 마른 땅이 되는 기적의 역사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따라서 여기서 엘리야의 겉옷은 곧 엘리야에게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사에게 임하였음을 상징합니다. 더불어 엘리사의 옷을 찢은 것은 그전까지의 삶이 이제 완전히 달라졌음을 상징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를 향한 믿음을 갖게된 그 순간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음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믿음을 갖게 된 순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죠. 그리스도인, 이것은 이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옷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옷입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있느냐에 따라서 내 자세가, 내 몸가짐이, 내 행동이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새옷을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한 옷을 입은 자입니다. 능력의 손으로 붙드시는 하나님의 옷을 입은 자입니다. 그에 합당한 모습으로 새로운 삶, 하나님의 기쁨 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