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41) 격(格)이 다른 삶 (2)보물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41) 격(格)이 다른 삶 (2)보물 <마태복음 6:19~24>


오늘은 종교개혁 504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로마카톨릭교회의 사제이자,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인,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지금으로부터 딱 504년 전 오늘,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붙이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개신교회를 영어로는 “Protestant”라고 하는데, “항의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참된 의미는 단순히 로마카톨릭에 대한 거부와 항의라기보다는 “초대교회 신앙의 회복을 위한 열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시리즈 설교로 “격이 다른 삶”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종교개혁의 열망 역시 격이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는 것에 저항하여, 참된 신앙의 회복을 위한 몸부림이 바로 종교개혁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호렙산새벽기도회 기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새벽에 깨어서 기도하는 것, 이 자체도 영적자기갱신의 모습입니다. 오늘 종교개혁기념 주일인 이 시간에는 “격이 다른 삶, 두 번째로 보물”에 대한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무엇을 보물로 여기고 살아오셨습니까? 그리고 격이 다른 삶을 위해서 무엇을 보물로 여기고, 그 보물에 대해서 어떤 마음, 어떤 시선,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할까요?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다산의 마지막 공부]라는 책에 보면, 다산 정약용선생이 마지막까지 붙잡았던 책이자, 조선최고의 베스트셀러라 불리우는 [심경]에 대해 다룹니다. 심경은 말 그대로 마음의 거울이라는 뜻으로 마음 다스림에 관한 책입니다. 그 책의 첫 줄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늘 휘청거리니 그 중심을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 21절에 말씀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자,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다고 말씀합니까? “네 보물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너에게 있어서 무엇이 보물이냐? 그것은 지금 네 마음이 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보물은 단순히 재물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금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보물입니다. 오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언제나 내 마음이 향하고 있는 그 보물, 그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그 보물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혹 내가 지금 생각하는 보물이, 내 마음이 항상 향하고 있는 그것이, 하나님께 맡겨드리며 기도하려고 보니 “이건 좀 아니다.” 싶다면,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내 삶에는 두 가지 차원의 보물이 있습니다. 먼저 영적인 보물입니다. 더불어 내 삶의 보물도 있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영적인 신앙의 삶 속에서도, 또한 세상의 삶적인 부분에서도, 정말 참된 가치를 지닌 것, 보물다운 것을 보물로 삼고, 내 마음 중심을 잘 지켜, 하나님 기뻐하시는 격이 다른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바른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분별력이란 어떤 말을 듣고, 상황을 바라보고, 그에 합당하게 무언가를 잘 결정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상황을 잘 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그리고 잘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의 출발이 어디인가?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고,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둡다.” 한 마디로 눈이 밝아야 잘 보고 잘 판단하고 잘 행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시력을 비유해서 영적인 시력, 즉 분별력이 중요함을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에 말씀하신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실 때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이 바로 분별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의 뜻대로 살아가려면 영적인 안테나를 주님께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교신을 해야 합니다. 이게 영적인 교제입니다. 우리가 호렙산 새벽마다 기도하는 게 주파수를 맞추는 과정이예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 역시 분별력이었습니다. 영적인 시선으로,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지금 로마 카톨릭에서 팔고있는 면죄부라는 것이 아무래도 아닌 거예요. 

  

우리가 바른 분별력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주신 밝은 눈으로 잘 바라보고, 잘 깨닫고, 잘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늘 하나님께 영적인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이 다른 신앙의 삶은 바른 분별력을 가져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내 눈으로 잘 바라보고, 내 머리로 잘 이해하고, 또한 내 마음으로 잘 깨닫고, 무엇보다 바른 영적 분별력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순종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우선순위를 잘 세워야 합니다. 


우리 삶에는 늘 우선순위가 존재합니다. 내가 결단하고 세워놓은 우선순위도 있고, 그저 생각에 따라, 내 행동에 따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져가는 우선순위도 있습니다. 더불어 신앙의 삶 속에서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마지막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과 재물”을 비교해서 놓고 판단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교훈은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앞의 내용을 이어 설명하는 거죠.” “그러므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목숨이 음식-보다, 몸이 의복-보다.” 비교우위를 말씀합니다. 목숨이냐 음식이냐? 몸이냐 의복이냐? 양자 택일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말씀합니다. 음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의 우선순위, 먼저 하나님을 붙잡으라는 거예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함을 깨달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내 영적인 삶에 우선순위가 바로 세워져야, 비로소 내 생활적인 것, 삶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바른 삶이 이어집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고 살아갈 때에, 이 모든 것이 더해지는 축복까지 받아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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