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교민뉴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일요시사 0 686 0 0

안은채 Auckland International College 



한 여자가 있다. 그녀 앞에는 수천년 전 빙하작용이 일어난 직후 형성된 아주 맑은 호수가 있고, 건너편에는 오두막 한 채가 있다. 사람들은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어떤 이들은 호수를 가볍게 가로질러 건너편 오두막에서 잠시 쉬다 다시 호수를 건너온다. 그녀도 호수를 건너고 싶지만 용기가 없다. 수영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호수 기슭에서 몇 미터만 가도 물속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그녀는 호수 주위만 빙빙 돌며 수영을 하면서 호수를 가로질러 헤엄치는 사람들이 몇 번이나 팔을 저어야 호수를 건너는지 관찰한다. 그녀는 근 한달을 호수 가장자리만 헤엄치다가, 이윽고 결심한다. 호수를 건너가기로. 팔을 150번 정도 휘젓자 호수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와있고, 다시 그만큼 팔을 휘저어 마침내 호수 반대편으로 건너가기에 성공한다. 그렇게 그녀는 오두막에서 잠시 쉬다 다시 수영을 하여 호수를 건너왔다.


이 여자는 줌파 라히리다.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작가이지만 여러 문학상을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장편소설<그저 좋은 사람>은 뉴요커들이 가장 많이 읽는 소설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녀는 1967년 영국 런던의 뱅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곧 미국으로 이민하여 미국인으로 살았다. 그러니 그녀는 뱅골어를 모국어로, 영어를 제2의 모국어로 쓰는 셈이다. 그런 그녀가 낸 에세이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오롯이 이탈리아어로만 썼다. 그러니 그녀는 뱅골어, 영어, 이탈리아어를 모두 유창하게 쓰는 셈이다. 이 책은 그녀가 어떻게 이탈리아어를 배우는지에 대한 여정이 담긴 에세이다. 근 20년을 미국에서 영어를 사용하다가 이탈리아어는 제2 외국어처럼 공부만 하다가 어느 날 로마로 떠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위해서다. 위의 호수 건너기는 이런 과정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그녀는 호수 주변만 빙빙 도는 식으로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다가 마침내 호수를 건너기로 마음 먹은 것처럼 이탈리아로 떠난 것이다. 


언어는 내 정체성이자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며, 내 미래를 이끄는 수단이다. 여기 뉴질랜드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집에서는 한국어를 말하고 밖에서는 영어를 쓴다. 영어는 이제 막힘 없이 말하고 쓰지만, 여전히 제대로 쓰기엔 어렵다. 한 언어를 배우는 것은 수학이나 과학을 공부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그래서 이 책은 더 의미 있게 읽힌다. 줌파 라히리는 미국으로 이민 가 학교생활을 시작하기 전 4년 동안 유아시절을 뱅골어를 썼다. 유일한 소통수단인 뱅골어가 학교에 들어가니 전혀 소용없었고, 학교에서 쓰는 영어가 불편해서 빨리 집에 돌아가 뱅골어의 품에 안기고 싶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몇 년 후 영어가 점점 익숙해지자 뱅골어가 더 이상 필요없어졌고, 커가면서는 뱅골어가 거추장스러웠다. 심지어 부모님이 뱅골어를 사용하는 것을 못마땅해했고, 밖에서는 뱅골어 액센트가 섞인 영어를 쓰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다 이탈리아어를 발견하고 그녀는 자신의 언어 여정에서 삼각형을 만들고 싶어했다. 뱅골어와 영어, 이탈리아어로 연결되는 삼각형에서 그녀는 언어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삶에 대해 좀 더 깊이 고찰하게 된다. 언어란 타인과의 소통을 넘어서서 자기 내면을 근원적인 곳까지 들여 볼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녀는 로마에서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여정을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로 다양하게 풀어놓았다. 미국에서는 학생들에게 문학과 영어를 강의하지만, 로마에서는 자신이 학생이 되어, 자신이 학생들에게 가르친 방법으로 스스로를 가르친다. 이것은 삶에 있어서 정해진 위치란 것이 없고, 우리가 목표로 하는 바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다시 배울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맑은 호수에서 수영하는 것을 즐기지만, 그녀처럼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건너 갈 용기와 모험을 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무엇인가를 시도하려면 제대로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목표를 크게 잡아, 실패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목표를 낮게 잡아, 이루는 건 큰 문제다.” 모두 자신만의 호수에서 빙빙 돌지 말고, 가장 깊은 곳을 지나 반대편으로 나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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