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64) 주 예수 나의 산 소망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64) 주 예수 나의 산 소망 <베드로전서 1:1~9>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역사와 함께 기독교에 엄청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기독교인들을 향한 박해도 엄청나게 심했습니다. 이러한 박해와 고난 중에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예루살렘을 떠나갑니다. 그러면서 정착한 곳이 본문 1절에 나오는 “본도와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입니다. 지금의 터키지역입니다. 그 중에서 데린구유라는 곳은 갑바도기아 지역에 위치한 곳으로서 이미 오래전에 힛타이트인들이 적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지어놓은 요새에,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가 확장시켜서 지하 도시를 만들어놓았습니다.

  

저들은 일평생을 지하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통풍과 우물등의 모든 시설을 다 갖추어놓긴 하였지만, 그 좁은 지하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저들은 예수님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그 지하에서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갑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그 참혹하고 힘든 땅, 그 아래의 삶 속에서, 도리어 저들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주 예수만이 나의 산 소망이 되십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부활의 아침, 우리에게도 이러한 소망이 새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만이 나의 산 소망이 되십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없는, 막을 수 없는, 무너뜨릴 수 없는, 끊을 수 없는, 예수 십자가 부활의 소망입니다.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눌 때에, 주 예수만이 나의 산 소망이 되심을 다시 한 번 믿음으로 붙잡는 이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부활의 산 소망이 되십니다. 


부활의 산 소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가장 큰 기쁨이요, 영원한 기쁨입니다.  본문 3절에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에게 산 소망이 생겨난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하심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 죽음과도 같은 고통 가운데 견뎌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 지하에 들어가서까지, 마치 무덤과도 같은 곳에서, 지금 내가 살아있는지, 아니면 지금 내가 죽어서 땅 속에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 삶을 견뎌낸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활의 산 소망입니다. 

  

예수님께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고난 받고 죽을 것이다. 하지만 삼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생명력 있는 선포입니다. 살아 있는, 썩지 않는 생명의 능력이 담긴 말씀의 씨앗이 심겨질 때에, 부활의 열매가 맺혀진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물론 감사해야 합니다. 나의 십자가, 물론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결국 부활의 생명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믿는 자의 죽음은 영생으로 향하는 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이 우리에게도 예비되어져 있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부활의 산 소망을 붙잡고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내일을 향한 산 소망이 되십니다. 


여러분! 카니발 아시나요? 카니발 하면 대표적으로 이탈리아의 베니치아 카니발, 프랑스의 니스 카니발이 있고, 가장 유명한 것이 브라질의 리우카니발입니다. 그런데 이 카니발 축제가 본래 기독교 문화와, 특별히 사순절과 연관이 된다는 것을 아시나요? 카니발은 라틴어 “카르네”와 “레바레” 이 두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인데, “카르네는 고기”를 뜻하고, “레바네는 격리”를 뜻합니다. 뜻을 풀어보면 “고기를 격리한다.” 다시 말해 “고기여! 안녕” 이런 겁니다. 

  

브라질은 대표적인 기독교 국가입니다. 초창기 기독교전통에서는 사순절 기간에, 절제와 금욕을 위해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40일동안 고기를 먹지 못하니까 “고기여! 안녕!”이라는 뜻의 “카니발 축제”를 벌이고는, 한 일주일간 실컷 먹고 즐거워하고, 사순절 때는 제대로 슬퍼하자는 뜻으로 카니발이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은 카니발축제에서 사순절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지만, 원래는 그런 의도였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제대로 슬퍼하고, 부활절에는 정말 큰 기쁨을 누리자. 결국 방향성이 다 내일을 향한 소망에 담겨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지금은 여러 가지 시험이 있어서 잠깐 근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언제나 평안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잠깐 근심하게 될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임 당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근심했습니다.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갔던 여인들은 근심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근심했습니다. 하지만 그 근심은 사흘만에 기쁨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걸 가르켜서 “사흘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을 받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흩어진 나그네와 같은 기독교인들은, 사흘이 지나도 그 고난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아픔의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을 향해 베드로는 5절에 권고합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영적인 보호하심을 향한 믿음 가지고,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한 구원의 은혜를 소망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베드로 역시 그 근심과 아픔을 다 겪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나.” 나도 잠깐 근심했고, 나도 잠깐 두려움 가운데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고, 그로 인해 심히 통곡하였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나를 찾아오셨다. 나에게 사랑의 고백을 들으셨다. 나에게 사명을 맡기셨다. 그렇기에 나는 너희들을 향해 권한다. “지금의 고난 중에도 오히려 크게 기뻐하라!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이러한 믿음으로 우리 주님 허락하신 더 아름다운 내일의 산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구원의 산 소망이 되십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받고 있는 초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그 눈앞에 있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그 속에서 어떻게 3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외칠 수 있었을까요? 설명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 이어서 9절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믿음의 확실함, 믿음의 결국, 그 종착역이 무엇이라고요? 구원입니다. “구원의 산 소망”입니다.

  

그렇기에 8절의 말씀처럼 지금 당장 내 눈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아도,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현실적인 고난, 죽음의 고통을 넘어선 구원의 산 소망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산 소망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모든 삶을 주관하심으로 선하신 역사를 이룰 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기에 기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소망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입니다. 부활 승천하심으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입니다. 마지막 날 다시 오심으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망 가운데 이미 구원 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 9절의 말씀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이미와 아직 사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 받았지만, 아직 구원의 완성은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 둘 사이를 연결해주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구원의 산 소망으로 구원의 확신 가운데 거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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