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19; 인권 운동가 - 존 민토 (John Minto)

교민뉴스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19; 인권 운동가 - 존 민토 (John Minto)

일요시사 0 101 0 0

<1953년 5월 16일~ >



‘NZ 운동권 대부’… 남아공 인종차별정책 없애는 데 큰 몫 


한국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SIS(Security Intelligence Service)는 

존 민토를 ‘주의할 인물 1호’로 꼽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꼭 뉴질랜드를 뒤흔들어 놓을 만한 문제가 일어났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존 민토 생각은 달랐다. 

누군가가 착한 마음을 갖고 움직여야만 세상이 바뀐다고 믿었다.



 ‘파워 오브 원'(Power of One). 

 오래 전 세계 극장가에서 ‘파워 오브 원’이라는 영화가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다. 이 영화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사는 피케(PK, 또는 Peekay)라는 한 남자아이를 통해 인종차별정책(Apartheid)을 비판하면서 단 한 사람의 힘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명작이다. 

 

1981년 뉴질랜드에서는 Maber, McDonlad, Moore, Murray(마버, 맥도널드, 무어, 머리) 같은 ‘M’으로 시작하는 성(姓)을 가진 사람한테 그리 좋지 않은 한 해였다. 그 가운데서도 Minto(민토)는 다른 M씨들보다 미움을 더 많이 샀다. 존 민토가 문제였다. 

 


럭비 팬들에게 '눈엣가시'로 여겨져

 

그해 뉴질랜드는 남아공 럭비팀 스프링복(Springbok, 남아프리카 산양의 하나)과 경기를 가질 예정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럭비’하면 사족을 못 쓰는 나라가 뉴질랜드 아닌가? 

 

큰 경기를 앞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럭비 팬들에게 존 민토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럭비 팬들은 인종차별정책을 공공연하게 쓰는 남아공 선수들을 뉴질랜드에 입국시킬 수 없다는 존 민토의 주장을 용납할 수 없었다. 존 민토는 럭비 팬들의 반발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장을 밀고 나가 뜻을 이뤘다. 럭비 팬들에게 숱한 협박과 야유를 받았지만 그는 이 일을 계기로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인권 운동가 자리에 섰다.

 

존 민토는 1953년 5월 16일 더니든에서 태어났다. 가톨릭재단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면서 수녀들에게 인성교육을 받았다. 복사(신부 옆에서 예식 집전을 도와주는 사람)를 맡을 정도로 신앙심이 두터웠다.

 

부모를 따라 네이피어(Napier, 북섬 혹스 베이에 있는 도시)로 옮겨 네이피어인터(Napier Intermediate), 네이피어하이스쿨(Napier High School)에서 공부했다. 여느 남학생들처럼 럭비를 즐겼으며 시간 나는 대로 수영과 스쿼시를 하며 쉬는 시간을 보냈다. 매시대학(Massey University)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다시 오클랜드교육대학(Auckland College of Education, 현재는 오클랜드대학 소속)에 들어갔다.



하트(HART)모임 참석하다 운동권 학생 돼

 

1975년 존 민토는 하트(HART)라는 모임에 참석했다. ‘HART’(Halt All Racist Tours, 모든 인종차별주의자의 여행을 금지하자)는 1969년 남아공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려고 만든 단체였다. 

 

이 모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존 민토는 요즘 말로 운동권 학생이 됐다. 뜻 있는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는 회원으로 참여한 지 5년 만인 1980년 HART 의장 자리에 올랐다. 아울러 그린피스, 핵무기비무장협회, 양성평등협회 같은 여러 NGO(비정부기구)에서 경력을 쌓아 나갔다. 현장 경험을 넉넉히 한 존 민토는 이듬해인 1981년 드디어 인권 운동가로 큰 발자취를 남기는 일을 해냈다. 남아공 럭비팀 스프링복과 뉴질랜드 경기를 무산시킨 일이었다. 

 

해밀턴 경기는 시위 참가자들이 운동장을 점거해 없던 일이 됐다. 티마루(Timaru, 남섬 캔터버리에 있는 작은 도시) 경기는 경찰이 럭비 선수와 관중을 책임질 수 없다는 이유로 취소했다. 마지막 경기인 오클랜드 게임 역시 시위 참가자들이 거세게 저항해 열리지 못했다. 존 민토가 이끈 시위대는 이든 파크(Eden Park) 경기장 상공에서 비행기로 ‘하얀 밀가루 폭탄’을 쏟아 부었다. 결국 경기는 기약 없이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뉴질랜드 국민 스포츠인 럭비는 다른 차원에서 인종차별정책을 없애는 데 한몫을 했다. 뉴질랜드 경기가 취소됐다는 뉴스는 전 세계, 그 가운데서도 영연방 나라를 압박했다. 뜻을 합쳐 남아공에 인종차별정책을 폐지하라는 여론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의할 인물 1호로 꼽히기도

 

존 민토가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감옥을 제집처럼 드나들었으며,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맞기도 했다. 칼리지 과학교사로 편하게 지낼 수도 있었던 그에게는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다.


한국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SIS(Security Intelligence Service)는 존 민토를 ‘주의할 인물 1호’로 꼽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꼭 뉴질랜드를 뒤흔들어 놓을 만한 문제가 일어났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존 민토 생각은 달랐다. 누군가가 착한 마음을 갖고 움직여야만 세상이 바뀐다고 믿었다.

 

뉴질랜드 사회는 두 쪽이 났다. 스포츠를 정치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는 쪽과 이 기회에 남아공 인종차별정책 철폐에 큰 힘을 보태야 한다는 쪽. 결론은 뒤쪽 승리로 끝났다.

 

존 민토는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인권 운동가로 자리매김했다. 1983년 뉴욕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인종차별주의 철폐 연설을 했으며, 1990년에는 유엔이 주최한 스웨덴모임에 강사로 나서 인권에 대한 소신을 떳떳이 밝혔다.

 

존 민토는 남아공 정부가 주려던 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남아공에는 아직 진정한 뜻의 인종차별주의 철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백인 1%가 나라를 움켜쥔 남아공 현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상이 마하트마 간디와 루터 킹 목사가 받았을 정도로 유명한 상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존 민토가 남아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0여 해 뒤인 1992년 남아공은 악명 높던 인종차별정책을 폐지했다. 공식 발표된 건 없지만 존 민토가 주도한 운동의 여파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92년 남아공에서 친선 럭비 경기 가져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 첫 흑인 대통령이 되고 나서 뉴질랜드를 찾아왔다. 그는 감옥에서 텔레비전으로 존 민토의 활동을 보았다며 공을 높게 평가해 주었다. 인종차별정책이 사라진 뒤 올 블랙스 럭비팀은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경기를 가졌다. 잔치 가운데 치러진 완벽한 친선경기였다. 뉴질랜드는 ‘당신들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인종차별정책을 반대했을 뿐’이라는 메시지도 전했다. 

 

1994년 남아공 럭비팀 스프링복이 뉴질랜드에 왔다. 옛날 일은 다 털고 스포츠 세계에서 멋진 한판을 치르자고 소감을 밝혔다. 그 뒤 뉴질랜드와 남아공은 럭비에서만큼은 호주 못잖은 영원한 강팀이자 선의의 맞수로 치열한 경기를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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