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24; 수녀 - 수잔느 오베르 (Suzanne Aubert)

교민뉴스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24; 수녀 - 수잔느 오베르 (Suzanne Aubert)

일요시사 0 453 0 0

<1835년 6월 19일~1926년 10월 1일>




헐벗고 따돌림당한 사람들의 벗  '뉴질랜드의 마더 테레사' 


그는 사역(봉사)하면서도 겉으로는 복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가 천주교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봉사 대상에서 뺀 경우는 없었다. 

종교를 넘어서 사회의 약자들이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찾아주는 데 

한평생을 쏟아 부었다.



21세기를 3년 앞둔 1997년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죽음이 있었다. 일주일 사이에 일어난 그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의 차이였다. 

 

한 사람은 부귀영화를 맘껏 누리다 교통사고로 끔찍하게 죽은 다이애나 영국 왕비였고 다른 한 사람은 한평생 버림받은 사람들을 몸 바쳐 돌보다 편안하게 이 세상을 떠난 테레사 수녀였다. 생물체로 봤을 때는 같은 죽음이었지만, 정신세계로 봤을 때는 결코 같은 뜻의 죽음이 아니었다.



1835년 프랑스 리옹 인근에서 태어나


 수잔느 오베르. 


 그는 ‘뉴질랜드의 마더 테레사’로 불린다. 한평생 삶이 테레사 수녀가 걸어온 길과 비슷했다. 테레사 수녀보다 훨씬 앞서 태어나고 70년 먼저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를 이야기할 때 테레사 수녀를 끌어들여야만 하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하지만 그가 추구한 이상이 테레사 수녀가 일궈온 것과 같다고 한다면, 그리 심기가 나쁠 일만은 아니다.

 

수잔느 오베르는 1835년 6월 19일 프랑스 리옹(Lyon)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에서 태어났다. 철저한 가톨릭교육을 받으며 자란 그는 어렸을 때 뜻하지 않은 병으로 한동안 고생했다. 병상의 시간은 삶과 종교 그리고 자기가 걸어가야 할 인생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한 기회가 됐다. 결론은 절대자에게 삶을 온전히 맡기기로 했다. 그렇게 수녀가 됐다.

 

오베르는 크리미아전쟁(The Crimean War, 러시아와 유럽 제국의 전쟁, 1853년 10월~1856년 2월) 때 간호사로 일하다가 몇 해가 지나 뉴질랜드행 배에 탔다. 1860년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멀고도 먼 남태평양을 향해 삶의 돛대를 올렸다. 폼팔리아(Pompallier, 1801~1871) 신부와 몇몇 수녀가 동행했다. 영국계 사람이 뉴질랜드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신교인도 아닌 가톨릭 수녀가 선교 목적으로 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오베르는 뉴질랜드에 도착하자마자 이 세상에서 따돌림당하고 버림받은 사람을 먼저 찾았다.

 


마오리 소녀들에게 관심 가져


 정부 관리, 정치인은 물론 종교 지도자들도 수잔느 오베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수녀가 복음만 전하면 되지, 무슨 딴 일을 하느냐”며 비웃었다. 불화와 분쟁 속에서도 그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제대로 대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예수님이 원하는 세상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수잔느 오베르는 ‘자비의 성모’(Our Lady of Compassion)라는 단체를 세운다. 이 단체를 활용해 그는 사역을 해 나갔다. 마오리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보육원을 만들고, 버림받은 파케하 어린이를 돌보는 일이었다.

 

거의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던 마오리 소녀들에게까지 교육을 베풀었다는 건 낮은 사람들을 향한 열정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사역 초창기 오베르는 마오리를 위해 몸을 바쳐 봉사했다. 뉴질랜드 북섬 전역을 돌며 그들의 불만을 ‘더 큰 사랑의 틀’에서 풀어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마오리 민간요법인 허브(Herb) 치료법을 파케하에게 소개해 준 일이었다. 제약 회사와 손을 잡고 허브를 약으로 만들어 호주와 영국에 수출했다. 수잔느 오베르는 마오리를 참마음으로 사랑해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민간 치료법의 전도사로 나섰다.

 

뉴질랜드에서 사역한 지 20년이 된 1879년 오베르는 마오리어 기도책과 가톨릭 교리문답책을 만들었다. 6년 뒤에는 마오리 회화책을 펴냈다. 마오리 말이 문자로 기록돼 후손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쓰였다.

  


맞벌이 부부 위한 주간 유치원 설립

 1889년 사역지를 웰링턴으로 옮긴 수잔느 오베르는 ‘성 앤서니 수프 식당'(St. Anthony’s Soup Kitchen)을 열었다. 병든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듬해에는 불치병 환자들을 위한 요양원을 세웠다. 환자 대부분은 돌봐 줄 식구 하나 없는, 말 그대로 사회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늙은이들이었다. 

 

그 사이 수잔느 오베르는 뉴질랜드 사회에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벌였다. 주간 유치원을 만든 일이었다. 어린아이들을 따로 맡길 데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부모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아침 일곱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맘 놓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 수잔느 오베르였다. 과부로 살고 있거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부인들에게는 ‘한 줄기 빛’ 같은 곳이었다.

 

1907년 수잔느 오베르는 아일랜드 베이(Island Bay, 웰링턴에서 5km 떨어진 곳)에 10대 젊은이들을 위한 단체를 만들었다. 몸과 마음에 장애가 있는 젊은이들이나 사생아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오베르를 비롯해 여러 수녀가 결핵 같은 만성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을 정성을 다해 돌봤다. 1910년에는 이 사역을 오클랜드로까지 넓혀 ‘성 빈센트 자비의 집’을 짓기도 했다.

 

수잔느 오베르는 1913년에 로마를 다녀왔다. 자신이 하는 일에 필요한 재정 도움을 받아야 했다.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은 오베르의 사역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약자들의 친구' , 아흔한 살에 

세상 떠나

 

수녀였던 수잔느 오베르에게 선행의 마지막 종착지는 ‘선교’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역(봉사)하면서도 겉으로는 복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가 천주교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봉사 대상에서 뺀 경우는 없었다. 종교를 넘어서 사회의 약자들이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찾아주는 데 한평생을 쏟아 부었다. 


 수잔느 오베르 수녀는 1926년 10월 1일 아흔한 살의 삶을 다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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