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26; 교육가 - 케이트 에저 (Kate Edger)

교민뉴스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26; 교육가 - 케이트 에저 (Kate Edger)

일요시사 0 473 0 0

<1857년 1월 6일~1935년 5월 6일>



여성 교육 선구자, “남녀평등의 기초를 놓다" 


케이트 에저는 1874년부터 3년간 잇달아 장학금을 탔다. 

1877년 7월 11일 그는 뉴질랜드 첫 여성 대학졸업생이라는 영예를 안는다. 

대영 제국 역사에서 처음 있는 기쁜 일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 꿈이 현실로 이뤄진 순간이다.



하얀 동백 한 송이 선물로 받아

 

대학 입학(The University of New Zealand, 정부가 모든 대학을 관리하고 있었음. 오클랜드대학이 생기기 전이며, 오타고대학이나 캔터베리대학 같은 명칭을 쓰지 않고 모두 뉴질랜드대학이라 했음)을 앞두고 또하나 넘어야 할 고비가 찾아왔다. 케이트 에저에 앞서 누구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대학 입학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케이트 에저는 입학서류에 이름과 나이만 적어 넣고 성별(Gender) 표시는 아예 뺐다. 대학 이사회는 필요 없는 말싸움을 피하려고 그냥 받아들였다. 대학에 들어간 에저는 1874년부터 3년간 잇달아 장학금을 탔다. 1877년 7월 11일 그는 뉴질랜드 첫 여성 대학졸업생이라는 영예를 안는다. 대영 제국 역사에서 처음 있는 기쁜 일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 꿈이 현실로 이뤄진 순간이다.

 

졸업식을 주관한 오클랜드 주교 윌리엄 코이(William Cowie, 1831~1902)는 케이트 에저에게 하얀 동백 한 송이를 선물했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학사모를 쓴 그에게 준 헌화였다. 뉴질랜드 첫 여성 대학졸업생을 지켜보는 1천 명이 넘는 키위는 아낌없이 손뼉을 쳐 주었다.

 

대학을 마친 케이트 에저의 첫 일터는 크라이스트처치 걸스 하이 스쿨(Christchurch Girl’s High School)이었다. 막 학교 문을 연 그곳에서 그는 교사로 일하며 더 많은 여학생이 대학에 들어가 뉴질랜드를 바꾸고 여성의 권리가 보장받을 수 있도록 기초가 튼실한 다리 구실을 했다.


 몇 해 뒤 스물여섯 살에 에저는 넬슨 칼리지(Nelson College for Girls)의 초대 교장이 됐다. 개교와 함께 교장을 맡은 그는 행정 일은 물론 영문법 과학 라틴어 수학 음악 지리 같은 여러 과목을 가르치며 여성 교육의 틀을 다져나갔다. 그곳에서 7년간 교장으로 일하면서 때로는 자기 돈으로 학교 장비를 사기도 했으며, 생활이 어려운 학생에게 힘을 보태려고 장학금을 주는 등 참 교육가 모습을 보여줬다.


 케이트 에저는 1890년 서른세 살 생일에 웨일스 회중교회 목사 윌리엄 에번스(William Evans)와 결혼했다. 새 신부 에저는 남편 사역지를 따라 웰링턴으로 옮겼다. 남편은 목회 일에 전념하고 그는 개인교습을 하며 신혼 생활을 보냈다. 때로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자원봉사로 공부를 가르쳤다.

 


아침에는 개인교습, 저녁에는 어른 공부 도와줘


 남편이 목회를 잠깐 그만두게 되자 먹고사는 일에 문제가 생겼다. 에저가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 학생 개인교습을 하고 저녁에는 어른들 공부를 돌봐 주면서 필요한 돈을 벌었다.

 

케이트 에저는 ‘여성 교육의 개척자’라는 신분을 잊지 않았다. 때마침 불기 시작한 여성의 권리를 높이는 일에 힘을 쏟았다. 여성과 어린이 보호센터, 기독여성절제회에서 핵심 구성원으로 일했다. 또 뉴질랜드가 지구에서 처음으로 여성투표권을 거머쥐는 일에도 힘을 실어 주었다.


 이 대목에서 생각할 것이 하나 있다. 여자 대학졸업생 1호인 케이트 에저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페미니스트(Feminist, 여권 신장론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할 수도 있다. 

 

그는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서 사명을 다 해 나가겠다는 의식은 있었지만 실제 삶에서는 어떤 것보다 ‘어머니’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세상 어려움을 이기는 힘은 어머니의 따듯한 가슴에서 나온다는 뜻이었다.

 

케이트 에저는 교육 전문가로서 영향력이 점점 커져갈 즈음 대학입학사정관으로 행정 일을 펼쳤다. 1929년 교육현장에서 물러나기까지 서른 해를 한결같이 봉사 정신으로 일관해왔다. 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교육부에서 2년 동안 일하기도 했다.



죽음 직전까지 봉사 손길 놓지 않아

 

1935년 5월 6일 케이트 에저가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까지 묵묵히 해낸 일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 쭈글쭈글한 손으로 기독여성절제회 회보 ‘화이트 리본’(White Ribbon)을 포장하고 회원들에게 발송하는 일을 도왔다. 

 

2003년에 오클랜드대학 안에 세워진 ‘인포메이션 커먼스’(Information Commons, 도서관 기능 보조 건물)는 케이트 에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여성 교육의 새 마당을 연 그를 영원히 기념하겠다는 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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