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44 ; 마오리 지도자 - 휘나 쿠퍼 (Whina Cooper)

교민뉴스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44 ; 마오리 지도자 - 휘나 쿠퍼 (Whina Cooper)

일요시사 0 360 0 0

<1895년 12월 9일~1994년 3월 26일>



'마오리에게 인권을!' 평화행진 이끈 '마오리의 국모' 


휘나 쿠퍼가 주축이 되어 펼친 마오리 인권과 권리를 위한 

평화 행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북섬 가장 위쪽 작은 마을에서 국회의사당이 있는 웰링턴까지

(약 1,000km) 멀고 먼 도보 행진은 뉴질랜드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어쩌면 영웅은 시대를 거슬러 살아가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시대에 적응했던 사람은 ‘그저 잠깐 왔다가 간’ 바람처럼 사라지지만, 시대를 역행한 사람 가운데 더러는 영웅으로 기록된다. 무엇인가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사상이든, 삶의 방식이든 아니면 하다못해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기이한 일까지…. 남과 다른 방향으로 간다는 건 외로운 선택이다. 하지만 밝은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외롭고 힘든 그 길이 영광의 길일 수도 있다.



등 굽은 할머니, 언론 전면에 나와

 

1975년 9월 뉴질랜드 언론은 한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중해서 보도했다. 등은 활시위처럼 구부러져 있었으며, 한 손은 낡은 지팡이, 또 다른 손은 여자 어린이 손을 잡고 있었다. 영락없이 시골 할머니가 손녀를 데리고 산책하러 가는 모습 같았다.

그 장면은 20세기 뉴질랜드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을 간추려 보여주었다. 할머니 이름은 휘나 쿠퍼, 마오리 여성 인권운동가였다. 그가 주축이 되어 펼친 마오리 인권과 권리를 위한 평화 행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북섬 가장 위쪽 작은 마을에서 국회의사당이 있는 웰링턴(약 1,000km)까지 멀고 먼 도보 행진은 뉴질랜드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휘나 쿠퍼는 1895년 12월 9일 북섬 테 카라카(Te Karaka)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족 지도자이자 가톨릭 지도자로, 지역 유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흠모한 휘나 쿠퍼는 물려받은 피 덕분인지 일찌감치 지도자 역량을 드러냈다. 


1907년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네이피어에 있는 성 조지프스 마오리 걸스 칼리지(St Joseph’s Maori Girls’ College, 1867년 세워진 가톨릭 학교)에 들어갔다. 마오리 소녀가 칼리지에 들어가는 일이 흔치 않았던 그때, 약간은 호사스러운 유학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자 집에 뜻하지 않은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딸의 신랑이라며 점찍어 놓은 홀아비 마오리 추장이었다.

 


얼짱, 몸짱 총각과 도둑 결혼 올려

 

휘나 쿠퍼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천 년을 넘게 이어 온 옛 풍습에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사랑도 하지 않는 늙은 남자 품에 안길 수 없었다. 대신 휘나 쿠퍼는 동네 조합에서 일하다가 초등학교에 교사 자리가 생겨 그곳에 들어갔다. 가르치는 실력은 뛰어났지만 곧 그만두었다. 배다른 형제들이 하나둘 학교에 입학하게 됐는데, 그 동생들을 제자같이 지도할 자신이 없었다.


교사 일을 포기한 휘나 쿠퍼는 라웨네(Rawene, 북섬 호키앙아 조그마한 마을) 가톨릭 사제관에서 2년 동안 가사 도우미로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협동조합에서 점원으로 근무했다. 이때 그에게 운명 같은 사랑이 찾아왔다. 법원 측량사로 일하던 리처드 길버트(Richard Gilbert)였다. 얼짱 몸짱 그리고 능력까지 ‘짱’인 그를 놓치기 싫었다.

1917년 5월 10일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도망가 가톨릭 신부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부모는 노발대발했고 부족 공동체는 손가락질을 했다. 휘나 쿠퍼는 철저하게 마오리 사회에서 버림받았다.


갓 태어난 딸 칼라(Calra)가 입고 있던 옷을 챙겨 집에서 키우던 돼지 한 마리를 데리고 고향 땅을 등졌던 그는 3년 뒤 집으로 돌아왔다. 결혼식을 맡았던 신부가 그의 능력을 높이 사 상당한 돈을 빌려주었다. 그 돈으로 아버지 집과 농장을 사들이고 가게도 하나 차렸다.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다. 영국에서 한꺼번에 많이 사 온 물건을 도매로 팔아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신부에게 빌린 돈은 3년 만에 다 갚았다. 


가게 안에다 우체국을 만들어 국장일까지 보았다. 두 번째 목장을 사서 낙농사업을 제대로 시작했다. 뉴질랜드농부조합 판구루(Panguru, 북섬 호키앙아 공동체) 지부를 만들어 첫 지부장이 됐다.

 


추진력 뛰어나 ‘아마존 굴착기’로 불려

 

1929년 마오리 출신인 민족부 장관 아피라나 응아타가 만든 법 덕분에 마오리들도 처음으로 땅을 개간하는데 나랏돈을 빌려 쓸 수 있었다. 휘나 쿠퍼는 1932년 아피라나 응아타를 불러 설명회를 했다. 아홉 달 뒤 조지 포브스(George Forbes, 1869~1947) 총리가 직접 찾아와 사업에 도움을 주었다. 그 일을 진행하는 데 휘나 쿠퍼는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다. 언론은 그를 ‘아마존 굴착기’(Amazone Excavator)라고 불렀다.


땅 개발 관련 일을 하다가 남자를 만났다. 투라키우타 쿠퍼(Turakiwuta Cooper)라는 유부남 측량사였다. 만나자마자 눈이 맞았다. 암으로 고생하던 남편 리처드 길버트가 세상을 떠날 즈음 휘나 쿠퍼 배 속에는 ‘또 다른 쿠퍼’가 자라고 있었다. 


휘나는 이 사실을 알리고 쿠퍼와 결혼하겠다고 선포한다. 마오리 사회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이혼 서류가 법원에서 정식으로 통과한 날, 휘나는 ‘쿠퍼’라는 성(姓)을 쓸 수 있었다. 당당하게 재혼을 해 얻었다. 한동안 마오리 사회에서 떨어져 살던 휘나 쿠퍼 가족은 얼마 뒤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 사건으로 전보다 영향력과 지도력은 줄어들었지만 호랑이 같은 야성은 여전했다.


휘나 쿠퍼는 수녀원 건립을 위한 땅 기증 같은 여러 화해의 몸짓을 건넸다. 그러면서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1947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뉴질랜드에서 럭비연맹 지부장에 올랐다. 마오리 사회가 그를 다시 받아들였다는 증거였다.

 


인권 행진 도중 6만 명 서명 받아내

 

1949년 토지 문제를 논의하려고 오클랜드를 찾아갔다. 지역을 벗어나 좀 더 큰 인물로 크고 싶다는 복안도 품고 있었다. 그때 뜻하지 않은 일이 터졌다. 두 번째 남편 투라키우타 쿠퍼가 심장마비로 숨졌다.


슬픔을 딛고 오클랜드에 새 터를 잡은 휘나 쿠퍼는 국가적인 마오리 지도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 1951년 9월 웰링턴에서 열린 마오리여성복지연맹(Maori Women’s Welfare League) 총회에서 그는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마오리 젊은이를 비롯해 노인과 아픈 사람을 주로 돌보는 이 기구는 1956년까지 300개가 넘는 지부가 생길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1957년 휘나 쿠퍼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자 회원들은 그에게 ‘국모’(The Mother of Nation)라는 명예를 안겨 주었다. 1960년대 들어 건강이 나빠지면서 그의 존재도 천천히 잊혀 가는 듯했다.

휘나 쿠퍼는 나이 여든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1975년 마오리 인권과 권리를 위한 행진을 이끈 주인공이 바로 휘나 쿠퍼였다. 행진 도중 6만 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두 달간에 걸친 대장정이 끝난 그해 10월 13일 국회의사당 마당에는 지지자 5천여 명이 휘나 쿠퍼를 에워쌌다. ‘국모’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휘나 쿠퍼는 1983년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땅으로 돌아갔다. 한때 버림받았던 땅, 거기서 열한 해 더 고향 맛을 즐기다가 숨을 거두었다. 1994년 3월 26일 한 세기에서 두 해 모자란 아흔여덟이었다.


글_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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