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94) ;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4)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94) ;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4) <빌립보서 1:27~30>

세상에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사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도 가면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책망하시면서 말씀하시죠. “외식하는 자들아!” 여기서 “외식”이라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가 “가면을 쓰다.”라는 뜻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행동하였으나, 실제 마음 중심은 그렇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부어 왕으로 삼으실 때에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겉모습보다 속이 더 중요하다.” 한 마디로 “가면을 벗으라!” 이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내가 신앙인으로서 교회든지 세상이든지, 내 삶의 자리에서, 어떤 마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록한 바울에게는 확실한 삶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장 20절과 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러한 확고한 믿음의 고백, 삶의 기준이 있었기에, 바울은 모든 믿음의 백성들을 향해서도 말씀합니다. 27절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여기서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을 원어로 직역하면 “시민답게 살아라.”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 모든 믿는 자에게는 또 하나의 시민권이 있는데, 바로 천국 시민권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는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 빌립보는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빌립보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로마 시민권자였고, 이로 인해 세금 면제와 더불어 각종 특혜가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빌립보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빌립보에 산다는 것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너희들이 빌립보에서 로마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고 살아가면 그게 엄청난 특권임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세상에서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차별된 삶을 살고자 하는데, 하물며 예수님을 믿어 천국의 시민권을 가졌으면, 그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않겠느냐?” 복음에 합당한 삶, 천국 시민권자로서의 삶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권면합니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어떤 의미인가요? 바울이 함께 있던지 그렇지 않던지, 다시 말해 누가 나를 지켜 보고 있던지 그렇지 않던지,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천국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27절 후반부에 보면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행해야 한다는 의미도 되지만, 그보다 먼저 한 개인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즉 나 자신의 마음과 행동, 언행심사가 다 한마음 한 뜻처럼 일치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천국의 시민권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영적인 시민의식이 높아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신앙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이러한 믿음 가지고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영적인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명확한 삶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잣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세 가지 기준, 그 첫 번째는 “성경”이고, 두 번째는 “성령의 내적 증거”, 마지막 세 번째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세 가지를 말씀드렸지만, 중심은 분명히 성경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담대함이 필요하다는 말씀에서 왜 이렇게 성경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걸까요? 말씀 위에 굳건히 서야 영적인 담대함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이 내 믿음의 반석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 내가 살아갈 믿음의 터전이 되십니다. 메시야의 오심을 약속하신 성경, 그 약속의 말씀 따라 이 땅에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영적 담대함의 근거가 됩니다. 

  

우리 신앙인의 기본자세는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주의 십자가 붙잡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악한 영의 공격이 있을지라도, 어떤 대적자들이 우리를 힘겹게 한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영적 담대함으로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본문 28절에 말씀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여기서 대적하는 자들이 누구인가요? 본문에서는 당시의 유대주의자들, 할례파, 거짓 교사들, 영지주의자들, 더불어 교회를 박해하는 모든 세력을 뜻합니다. 이러한 대적자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 언제나 교회의 역사 속에 존재해왔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분명히 말씀하죠. 대적자가 있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담대함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되고, 대적자에게는 멸망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담대함 가지고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주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주의 십자가 능력만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승리케 하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영적으로 담대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주를 위해 고난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성도님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주를 위해 고난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다 그렇게 생각하죠. “하나님 믿으면 잘 살게 됩니다. 예수님 믿으면 축복 받습니다. 물질적으로도 부요하게 되고,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하시고, 자녀들도 잘 되게 하십니다.” 그러다보니까 가정에 어떤 어려움이 생기면, 누가 질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누가 중요한 시험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뭔가 계획한대로 되지가 않으면, 당장에 “회개해.” 이 말부터 나옵니다. 내 신앙과 삶의 축복을 무조건 하나로 연결해서 생각하여 오해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좋은 일이 생기고, 복된 일이 생기고, 뭔가 잘 될 때, “하나님 왜 저입니까?” 이렇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러면 “하나님! 왜 저입니까? 왜 저에게 이런 어려움이 생기나요?” 하나님을 원망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29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표준새번역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서 고난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여러분이 받는 특권입니다.” 뭐라고요? 특권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예수님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해 드릴 수 있다는 것. 이게 얼마나 귀한 것인가요? 내가 뭐라고 주를 위해 고난을 당합니까? 내가 뭐 대단한 존재라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까지 동참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바울이 지금까지 당한 모든 고난이 다 주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기쁘게 감당합니다. 내가 자랑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겪은 고난을 자랑할 정도입니다. 왜요? “죄인 중에 괴수”였던 자신에게 주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맡기시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0절에도 말씀합니다.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풀어보면, “너희들이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너희들도 바울이 당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니, 잘 준비하여 고난의 특권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고난의 자리든, 영광의 자리든,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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