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45 ; 마오리 지도자 - 테 휘티 오 롱고마이 (Te Whiti o Rongomai)

교민뉴스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45 ; 마오리 지도자 - 테 휘티 오 롱고마이 (Te Whiti o Ro…

일요시사 0 25 0 0

<1830년 ?월 ?일~1907년 11월 18일>


토지전쟁 때 비폭력, 무저항 운동 펼친 '남태평양의 간디' 


 테 휘티가 무력행사에 대항해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펼치고 있을 때, 마침 아일랜드에서 온 방문객들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훗날 간디를 만나 

남태평양 뉴질랜드에서 본 마오리 지도자 얘기를 전했다. 

무저항운동으로 자유를 쟁취한 테 휘티의 발자취는 

간디의 독립운동에 좋은 본보기가 됐음은 

말할 나위 없다.



저항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침묵’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고 믿는다. 한마디 말없이 숱한 고초와 역경을 이겨내는 순교자 같은 모습에서 경외심을 느낀다. 

 

마하트마 간디(인도), 마틴 루터(미국), 넬슨 만델라(남아공)의 공통점은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해 비폭력, 무저항을 무기로 썼다는 사실이다. 수없이 많은 혁명가가 역사에 나타났지만 이들만큼 세상을 뜻깊게 변화시킨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뉴질랜드에서도 그런 인물을 찾을 수 있다. 19세기 후반 그때만 해도 침략자로 여겨졌던 파케하를 향해 침묵으로 마오리의 자존심을 지키고 권리를 외친 테 휘티 오 롱고마이(줄여서 테 휘티)가 그 주인공이다.



마을 성지(聖地)에서 이름 따와

 

테 휘티는 1830년 타라나키 응모투(Ngamotu)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름은 테 휘티가 살던 마을(파리하카, Parihaka)의 언덕, 푸케 테 휘티(Puke Te Whiti)에서 따왔다. 조상들의 묘지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진지가 펼쳐져 있는 파리하카 성지 가운데 한 곳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도력이 있었던 테 휘티는 마을 어른들한테 특별교육을 받았다. 마오리 지도자로서 사는 법과 성지를 지키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신식 교육도 같이했다. 영국 루터교 에드워드 선교사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으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세례도 받았다.(어떤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그는 훗날 세례 자체를 부정했다) 마오리 교육과 서양 교육을 둘 다 맛보며 몇십 해 뒤 보여준 피스메이커(Peacemaker, 평화를 만드는 사람)의 밑바탕을 다져 나갔다.


고향 마을에는 테 휘티의 친구가 있었다. 토후 카카히(Tohu Kakahi)라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테 휘티와 토후 카카히는 상대방 여동생을 아내로 삼았다. 둘은 늘 의기투합해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면서 부족의 중심인물로 우뚝 섰다.

이들이 지도자가 됐을 무렵, 타라나키는 큰 전쟁에 휩싸였다. 수십 해 동안 잠복해 있던 마오리와 파케하의 문제가 드디어 터졌다. 와이카토(Waikato)와 함께 타라나키도 분쟁 지역이었다. 



토지전쟁 한복판에서 고군분투


어떻게든 땅을 빼앗으려고 하는 파케하와 수백 년 조상들이 살아왔던 땅을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는 마오리들의 갈등은 결국 전쟁으로까지 번졌다. 뉴질랜드 역사는 이 전쟁을 ‘토지전쟁’(Land War, 1845~1872)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는 현지 실정을 잘 모르는 파케하가 고전했다. 하지만 곧 신식무기로 무장한 파케하들이 마오리 땅을 평정해 나갔다. 마오리 부족은 파케하에게 거세게 대항했지만 전투에서 지거나 불평등 협상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 가운데 유독 테 휘티가 돋보였다. 비폭력, 무저항을 무기로 썼다는 점 때문이었다. 총에는 총으로, 폭력에는 폭력으로만 일관했던 쌍방에게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꼭 무력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1873년 정부는 뉴질랜드정착법을 만들어 타라나키 땅을 빼앗았다. 사법부가 토지 몰수는 불법이라고 밝혔지만 판결은 아무 짝에 쓸모가 없었다.


정부는 영국에서 온 이주자들을 위한 새 땅이 필요했다. 그들이 먹고살 수 있는 개척지를 마련해 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타라나키가 희생터였다. 원주민들은 300만 에이커에 이르는 땅을 빼았겼다.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었던 약자의 현실이었다.

1879년 드디어 테 휘티가 이끌던 부족 마을도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다. 이때 테 휘티는 비폭력, 무저항을 외쳤다. 조지 그레이(George Grey, 1812~1898) 총리가 테 휘티 쪽과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바뀐 세상’ 보여주며 전향 유도


더 기다릴 수 없었던 정부는 총칼을 앞세워 진압했다. 다른 부족과는 달리 파리하카 부족은 무기를 들고 저항하지 않았다. 대신 어린아이들과 부인들이 정부군을 따뜻하게 맞았다. 노래를 부르거나 꽃가루를 뿌리기도 했다. 무기로 싸우는 전쟁이 아닌, 침묵으로 싸운 전쟁이었다.

마침내 테 휘티와 토후 카카히, 다른 마오리들이 죄인 굴레를 쓰고 남섬 더니든으로 끌려갔다. 감옥에 갇혀 노예처럼 말 못할 중노동에 시달렸다. 테 휘티도 예외는 아니었다. 


테 휘티는 “사악하게, 포악하게 평화를 방해한 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1년 형을 받았다. 정부는 테 휘티에게 남섬 곳곳을 구경시켜 주면서 ‘바뀐 세상’을 직접 눈으로 보게 했다. 전향을 요구한 셈이었다. 하지만 테 휘티는 한결같았다. “토지를 돌려 달라”는 말뿐이었다.


친구이자 동지였던 토후 카카히는 감옥에서 나오면서 전략을 바꿔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항해 나갔지만 테 휘티는 자기 노선을 지켰다. 침묵(비폭력, 무저항)이 언젠가는 이길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후세 사람들은 테 휘티를 ‘남태평양의 간디’라고 한다. 엄밀히 따지면 간디를 두고 ‘인도의 테 휘티’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테 휘티가 50여 해 뒤 인도의 민족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념탑에 “…그로 인해 평화가 왔다” 새겨져

 

테 휘티가 무력행사에 대항해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펼치고 있을 때, 마침 아일랜드에서 온 방문객들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훗날 간디를 만나 남태평양 뉴질랜드에서 본 마오리 지도자 얘기를 전했다. 무저항운동으로 자유를 쟁취한 테 휘티의 발자취는 간디의 독립운동에 좋은 본보기가 됐음은 말할 나위 없다.


1907년 11월 18일 테 휘티는 고향 땅에 묻혔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그곳을 지키려고 모진 핍박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이겨낸 그에게 뉴질랜드 역사는 ‘비폭력, 무저항으로 세상을 바꾼 인물’로 기록해 놓았다. 


그를 기념해 세운 탑 위에 새겨진 글이다.

 “테 휘티는 악을 물리치기 위한 대단한 일을 해냈다. 그로 인해 이 땅에 평화가 왔다.”



글_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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