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의 아모르파티 20 ; Best Antique

교민뉴스


 

백동흠의 아모르파티 20 ; Best Antique

일요시사 0 522 0 0

늙수그레한 얼굴, 검버섯이 군데군데 피어있다. 앞쪽으로 기울어진 허리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단풍잎 지고 난 회색 나무 둥지처럼 밋밋하다. 공항 갈 손님을 태우러 집 앞에 도착하니, 할아버지가 여윈 손에 고리짝 트렁크를 하나 들고 나온다. 얼른 가서 받아 든다. 택시에 싣는다. 단출한 물건 몇 가지만 넣어서인지 가볍다. 퀸스타운에 가시는 할아버지. 옆 좌석에 앉고도 말이 없다. 낡은 가방에 마음이 쓰인다. 몇 년을 간직해온 걸까. 궁금증에 할아버지께 조심스레 여쭤본다.


“가방이 관록 있는 골동품 같아요.” 


예의 좋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한 50년 됐어. 신혼여행 때 구한 거니까.” 


할머니께서는 이미 돌아가시고 혼자 사신다고. 반세기, 50년 세월 속에 가족과 함께한 희로애락과 우여곡절. 가방 속에 그 모든 애환이 차곡차곡 빼곡하게 개켜져 있지 않을까? 추억 깃든 증표로서 곁에 두고 사는 생활. 지금은 퀸스타운 손녀 집에 다니러 가는 길이란다. 추억담은 트렁크라도 함께해서 덜 적적했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이는 결코, 한순간에 쓰러지지는 않는다는 말이 명답으로 다가온다. 다소 불편해도 의미와 가치에 무게를 두는 생각을 존중해마지않는다. 



수년전 고국 소식이 떠올랐다. 청문회장에 공직자 후보로 나온 노교수의 낡은 가방이 눈길을 끌었다. 후보자는 국회에 도착, 갈색 가방을 의자 옆에 내려두고 질의를 받았다. 대학강단에서 많은 제자를 가르치면서 썼던 낡은 가방에 청문회 질의응답 자료를 넣어온 듯했다. 갈색 가죽 가방은 겉이 해져 흰색 밑천이 드러났다. 손잡이도 닳아서 허여스름했다. 세월에 풍화되듯 색이 바랜 상태였다. 


세상 온갖 풍파 다 겪은 증인처럼 가방 곳곳이 생채가가 나 있었다. 가방 안에는 자료들이 가득 차 터질 듯했다. 책상 아래 놓인 낡은 가방. 마치 주인을 지키는 충견처럼 발 옆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필요한 자료는 다 있으니 염려 마셔요. 주인님!’ 든든한 Body Guard처럼 믿음직스러웠다. Best Antique!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굴곡진 삶의 궤적이 느껴졌다. 학자의 삶을 웅변보다 강렬하게 보여주는 낡은 가방이었다.

불현듯 내 곁에 있는 낡은 가방이 반추되어 올라왔다. 오클랜드에 있는 노인대학에 강의 요청이 있었다. 그때, 강의 준비 차 들고 갔던 가방이다. 강의 자료와 나눠줄 프린트물 그리고 화이트보드용 지우개, 여러 색깔의 마커 … . 아주 오래된 가방이다. 이민 오기 전, 고국에서 직장 다닐 때부터 사용했으니 얼추 35년은 된다. 고국에서 10년, 이민 와서 25년. 세월의 손때가 배어있다. 


이민 초기, 유니텍에서 영어 배우고 2년간 목수일 공부할 때도 가지고 다녔다. 한국학교 아이들 가르치느라 3년간 요긴하게 썼다. 토요일에 열리는 한국학교 수업을 위해 평소 준비한 교재 부교재가 가방에 가득 담겼다. 그 후, 성당에서 성경공부 모임과 기도 모임에서 배우고 봉사하는데도 10년을 들고 다녔다. 레지오 신심 단체에서 5년간 직책을 맡아 매주 회합을 가질 때도 사용했다. 문학회 활동하며 수필 문학 강좌 때도 자료와 참고 책자를 넣어서 다녔다. 색 바랜 갈색 가방. 겉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가방 속은 천이 낡아서 실올이 풀렸다. 고국 같으면 길거리 모퉁이에 신발 가방 수리점이 흔해서 쉽게 손을 보련만 여기서는 여의치가 않다. 


새것 구해도 되겠지만, 애착이 가는 물건이라 손봐서 쓰고 싶다. 애착이 가고 편해서다. 오래된 친구처럼 마음이 편안해지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내 인생의 반을 함께한 친구처럼 여겨진다. 운전 일을 조금 덜 하면서 여유를 갖게 되면 이 가방을 들고 버켄헤드 도서관에 다니고 싶다. 수필집과 소설책에 쓰일 마무리할 원고 뭉치를 담아갈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며 새것보다는 익숙한 것에 머무르며 담담하게 사는 생활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최근 들어 부쩍 책들이 책장에 많이 꽂히는 편이다. 어째 좀 부자가 된 느낌이 든다. 많은 책 중에 애착이 더 가는 책이 있다. 성경, 불경, 고전, 인문학책들이다. 오래된 이야기 속에 깊은 진리와 우러나는 맛이 숭늉처럼 담박해서다. 보이는 외관보다는 속에 담긴 가치와 의미를 지닌 것에 마음이 가는 나이인가. 어디 가방뿐이겠는가. 만물의 주인인 사람에게서야 말해 뭐하겠는가 싶다. The best antique is an old friend. *





작가 백동흠 

수필 등단: 2015년 에세이문학. 소설등단: 2015년 문학의 봄

수필집: 아내의 뜰(2021년). Heavens 지금여기(2022년).

수상: 2017년 제 19회 재외동포문학상 수필 대상 (깬니프!).

     2022년 제 40회 현대수필문학상 (Heavens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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