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13) 예수님 걸어가신 길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13) 예수님 걸어가신 길 <요한복음 8:21~30>

탄광촌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안찬호 선교사님은 아프리카 케냐에서 엄청난 헌신을 통해 이뤄낸 성공적 사역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너무나도 무능하고 우둔한 저를 구원해주셨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한 영혼을 살리시고자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에게는 변화의 능력, 구원의 능력, 생명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눌 때에, 나를 위해 걸어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바라보며, 우리도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을 걷고자 믿음으로 결단하는 이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깨달을 수 있음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순절 기간에 새벽마다 마태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마태복음도 그렇고,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도 그렇고, 모든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언제나 평행선입니다. 예수님과 당시 종교지도자들과의 대화가 늘 평행선입니다. 예수님은 위에서 오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분입니다. 완전한 거룩함이십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아래에서 났습니다. 땅에 속한 존재입니다. 죄악된 삶에 젖어 있습니다. 마치 흑과 백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하늘에 속한 존재와 땅에 속한 존재로서 하나됨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깨닫지도 못합니다.예수님 주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니까,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지금 눈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심에도, 예수님의 주 되심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 길의 끝은 사망일 뿐입니다.


깨달을 수 있음이 은혜입니다. 제가 새벽마다 자녀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의 내용 중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 자녀손들이 바른 분별력을 갖게 하옵소서. 바른 가치관을 갖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붙잡게 하옵소서.” 이 모든 기도의 내용이 결국은 하나죠. 깨달음입니다. 

 

마음으로 깨닫는 것, 깨닫고 바른 길로 가는 것, 깨닫고 바른 가치관을 품고 살아가는 것, 정말 귀한 일입니다. 자녀가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깨달아 안다면,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간다면, 그러면 부모님이 걱정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아 안다면, 주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안에 담겨진 주의 뜻을 깨달아 안다면, 그리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얼마나 큰 기쁨이 임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또 얼마나 복된 삶이 되겠습니까?  이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 걸어가신 그 길을 바라보며,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가슴 깊이 깨달아 알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에 감사함으로 주의 십자가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주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아 알고 있음이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 안에 늘 거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믿어야 살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향해 이의를 제기하고, 마치 “딴지”를거는듯한 모습을 보여도, 저들도 예수님 앞에서는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세히 설명하십니다.21절에 “너희들이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 말씀도 저주나 책망보다는 안타까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적인 한계, 율법적인 한계,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야관에 대한 한계로 인해서 예수님의 구원자되심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대하더라도 선입견이 있으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습니다.색안경을 끼면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을 대할 때도 선입견이 있으면, 제대로 바라보기도 어렵고, 제대로 관계를 맺어가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자신들의 생각으로만 바라보니까,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걸 안타까워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모든 바리새인이 다 같았을까요?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구원에 대해 묻지 않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을 말씀합니다. 나중에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할 때에, 예수님을 변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이후에는 예수님의 시신에 몰약을 발라드리려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니고데모는 이후 믿음을 지키다가 유대인들에 의해 순교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의 말씀을 받을 때에, 결국 예수님을 믿어 거듭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28절 전반부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 알고.” 여기서 “인자를 든 후”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는 알게 될 것이라는 거죠. 백부장의 고백처럼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대제사장이, 서기관들이, 율법학자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에 깨닫고 변화된 모습을 보였나요? 대부분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는 정말 몰라서라기보다, 알게 되었지만, 이제는 알아도 내 자리를 버릴 수 없기에, 여전히 모르는 것처럼 외면한 것입니다.요즘넷플렉스에서 [나는 신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습니다. JMS니, 아가동산이니 하는 이단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도 이런 겁니다. 나중에 깨달아도, 이게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아도, 이제는 돌이키지 못하는 거예요. 실체를 알았으면서도 “이제 어쩔 수 없다.”면서 진실을 외면하려고 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어야 살 길이 열립니다. 그런데 무작정 믿으면 안됩니다. 아무 거나 믿으면 더더욱 안됩니다.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로마서 10장 9절과 10절에 바울이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십자가 구원의 길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에게 살 길이 임하고, 구원이 임하고, 영생의 기쁨이 임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날마다 주의 십자가 의지하여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주의 뜻을 행하는 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알렉산더 플로그하우스 박사는 [두려움을 정복하라.]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실제로 거절당하는 것보다 더 두렵다.” 지금 거절 당하는 것보다, “이거 말했다가 혹시 거절 당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두려움이 더 크다는 겁니다. 그런 두려움 때문에 아예 시작도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한국에서 지금 프로야구 시범경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시범경기니까 괜찮은 신인들에게 기회가 많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기회를 잡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단순히 실력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 마음에 얼마나 담대함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믿음의 삶도 똑같습니다. 두려움에 빠지면 제대로 가기가 어렵습니다. 두려움에 빠지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담대함을 가지면 어떤 문제와 시련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래서 믿음과 두려움은 정확하게 반비례 관계입니다. 믿음이 커지면 두려움은 작아지고, 두려움이 커지면 믿음은 작아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자라고 한다면, 내게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언제나 담대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담대함을 가질 수 있나요? 믿음의 백성으로서의 담대함, 간단하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어린 아이가 밤길을 걸어가도 아빠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면 두려움 없이 담대함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똑같은 길을 걸어가도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그 길이 달라집니다.

주의 뜻을 행하는 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믿음장이란 별명을 지닌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수많은 믿음의 인물들이 소개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2장 1절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앞서 언급한 수많은 믿음의 인물들을 보라는 거죠. 저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셨고, 이를 통해 두려움 없이 담대함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갔으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너희들도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삶도 믿음의 삶으로 기억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하나님이시지만, 참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공생애 사역의 모습 속에서 인간적인 슬픔과 아픔과 고통도 겪으셨고, 겟세마네에서 마지막 기도하실 때에는 “주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옮기시옵소서.”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까지도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주의 뜻을 붙잡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렇게 걸어가신 길이 구원의 길이 되었고, 생명의 길이 되었고, 우리가 이제 따라 걸어가야 할 믿음의 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걸어가신 길, 우리를 위해 열어주신 길, 일평생 우리 주님과 동행함으로 함께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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