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39)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39)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마태복음 7:7~12>

할렐루야! 거룩한 주일,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충만함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입니다.


우리가 보통 기도의 사람이라고 하면, “5만번 기도응답받은 죠지 뮬러”를 떠올리곤 합니다. 죠지 뮬러는 1805년 독일의 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늘 아버지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 술과 도박을 즐기고, 감옥에 다녀오기도 하는 등의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를 따라간 기도모임에서 특별한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은 무릎을 꿇고 진실함으로 기도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은혜를 받은 뮬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드디어 제가 오늘 당신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목회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중에, 콜레라가 유럽 전역을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수만명이 콜레라로 죽임을 당하였고, 거리에는 구걸하는 고아들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뮬러는 고아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함께 식사를 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아들이 너무 많아서 집에 발 디딜 틈도 없게 되었고, 죠지 뮬러는 “고아원을 만들라.”는 주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즉시로 브리스톨에 고아원을 세워 2천명이 넘는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일평생, 93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전세계 42개국을 다니면서 약 3백만명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66년 동안 무려 15만명의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하여, “고아들의 아버지” 또한 “기도의 사람”이라고 불리우게 됩니다. 


죠지 뮬러는 분명한 기도의 원칙을 제시합니다.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는 바른 동기에서 시작되는 기도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는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자신이 먹고 살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고아들을 먹이고 살리는 일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또한 그는 심한 병으로 죽을뻔한 위기가 있었는데,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모든 기도의 동기, 방향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 가르쳐주신 산상수훈의 말씀 중,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또한 믿음의 백성들이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기도의 사람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7절과 8절에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간구하는 구체적인 기도의 방법으로서, 삼중적인 기도법을 제시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이 세 가지 기도의 방법, 즉 삼중적인 기도법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뒤로 갈수록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첫 번째인 “구하라.” 이는 단순히 마음 속으로 간절함을 품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갖고 싶습니다. 그러면 구합니다. 이어서 두 번째인 “찾으라.” 이건 좀 더 적극적이죠. 구하는 것은 그냥 “주세요.” 정도라고 한다면, “찾으라.”는 내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기 위한 실천적인 행동이 더해집니다. 마지막 세 번째 “문을 두드리라.” 찾는 것보다 더 강력해집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친구의 집 문을 두드리는 자가 나오죠.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돌아가라.” 하지만 친구는 계속 문을 두드려서 결국 떡을 얻게 됩니다. 가장 적극적인 간청, “문을 두드리리는 것”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점점 더 적극적으로, 강하게 구할 수 있는 까닭은 응답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도할 때 언제나 이런 확신을 가지고 계신가요? 사실 기도하다보면, 어쩔 때는 길이 안보일 때도 있습니다. 기도는 하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안될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요? 더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라. 구하는데, 안될 것 같아요. 그럼 더 적극적으로 찾으러 가는 거예요. 그래도 안 될 것 같아요. 그럼 더 적극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것까지 가는 거예요. 이게 기도응답을 위한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앞에 기도할 때에 언제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찾는 자에게 찾아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지식이나 경험이나 생각으로 기도응답의 여부를 속단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저 구하는 것입니다. 찾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이 가까워보이면 더 기도하시고, 기도응답이 멀어보일지라도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말씀의 성취를 이루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비유의 말씀과 함께 11절에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악한 부모라고 해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고 할 터인데,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우리를 자녀 삼아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조급함이 사라집니다. 염려와 근심이 사라집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나 내 삶에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좋은 때에 허락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이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성서조선]이라는 기독교잡지를 쓰셨던 김교신선생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1943년 마지막 날 한 해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지난 1년 동안 저를 보살펴주심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부족한 것이 주님께 바친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더욱더 감사하옵기는 제 기도를 기각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해주신 것에 감사하는데, 더 감사한 것은 응답되지 않은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기도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더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이것이 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을 위해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간구하는 기도응답에 감사하게 됩니다. 혹 기도가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더 선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함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매 순간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주의 사랑을 믿으며 체험하며 감사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마지막 12절 말씀입니다. 우리 12절은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른 바 “황금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황금율을 따라 사는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다.” 즉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앞서 기도에 관한 말씀을 전하다가 왜 갑자기 황금율이 나올까요? 12절에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이 말은 앞선 모든 내용이 있기에 이 말씀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12절의 황금율의 말씀을 기도에 관한 가르침의 결론으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황금률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대접받기를 원하는 그대로, 상대방을 대접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내가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면 나도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용서받기 원합니다. 그러면 나도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존귀하게 대접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나도 상대방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황금률의 예들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결국 황금률은 내가 나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듯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히 여기고, 내가 나의 삶을 존귀하게 대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삶을 존귀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황금율과 기도의 가르침은 어떤 연관이 있기에, 이렇게 마지막에 결론처럼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런 겁니다. “네가 사람들간의 관계에 있어서 받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먼저 상대방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그런 모습을 가지라.” 내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받으려하는 것 이전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좀 더 수준 높은 기도를 드리고, 수준 높은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서론에 말씀드린 죠지뮬러의 기도의 원칙과 같습니다. “선한 동기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올려드리는 것.” 그게 오늘 기도에 관한 가르침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호렙산 특별 새벽기도회 기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새벽마다 깨어 주님 전에 나와 기도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각 가정에서 영상으로 함께 참여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혹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도 아마도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지만, 그래도 의식은 다 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백성들의 삶에 있어서, 기도는 빠져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경건의 훈련입니다. 주님 전에서, 가정에서, 또한 삶의 터전에서,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든지,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기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 거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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