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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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흠> 빈자리 여행

일요시사 0 458 0 0

오랜만에 아내가 비행기를 탔다. 친구들과 남섬, 퀸즈타운으로 출사여행을 떠나는 아내의 얼굴이 가을 홍시처럼 발그래졌다. 가을 단풍 여행을 하며, 아내의 빈속이 보름달만큼 가득 차 돌아오기를… .


아내의 빈자리, 4박 5일. 집에 혼자다. 좀 휑하다. 아침 일찍 일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빈집이다. 언뜻 보면 그렇다. 그러려니 싶은데 시선이 바뀐다. 발 언저리에서 꼬리 치고 있는 강아지, 도니에게 눈길이 쏠린다. 그동안 아내의 돌봄 속에 있었던 강아지. 밥 주고, 산책하고, 놀아주는 일… . 멀리서 가까이 가는 여행이 내게도 시작된다. 4박 5일 아내의 빈자리 여행이다.


아침에 일어나 도니를데크에 내놓고, 강아지 밥을 준다. 나 역시 아침을 차려 먹고 출근길을 서두른다. 강아지 놀기 좋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 일터로 나가려다 눈길이 멈칫한다. 바이올렛 꽃 화분이 안경 너머로 걸린다. 하나 둘… . 수십 개의 앙증스런 화분 꽃이다. 그중에서 이파리가 축 처진 바이올렛 하나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손에 들었던 도시락통을 내려놓고, 2리터들이 페트병에 물을 채운다.


조심스레 바이올렛 화분에 물을 준다. 웬 구부정한 남정네의 등이 거울 속에 비친다. 아내가 화분에 물주라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아내 대신 물을 주고 있다. 평상시는 별로 생각도 못 한 내 모습에 멋쩍게 웃음이 나온다. 갑이 안 하면 을이 하기 마련이라더니, 맞다. 평소 아내가 물 주는 것을 봐둔 적은 있어서인지 엇비슷하게 따라 하고 있다.


페트병 아랫부분을 잘라 만든 화분과 아기자기한 모양을 한 작은 화분들. 가든 흙을 담아 그 속에 잎 파리 하나 꽂아 물주며 햇살에 맡긴 시간. 다양한 모습으로 앙증스레 꽃을 피운 바이올렛이 생경하다. 거실 곳곳에 수십 개의 화분을 만들어 물주던 아내더러 화를 낸 적이 있다.


“공간을 넓게 쓰지, 웬 이리도 많은 화분인감?”


아내의 반응은 피어나는 생명에 역할을 해준 즐거움에 젖어있었다.


“내 주머니가 넉넉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에게 바이올렛 한 화분씩 선물로 주는 낙(樂), 알기나 한감?”


물 한 통쯤 퍼다 주려던 것이 계속 이어진다. 그만하려 해도 구석에 있는 바이올렛이 애 띠게 윙크를 한다.


‘저, 여기 있어요.’


창틀에 있는 보라색 바이올렛도 손짓한다. 아우성들이다. 계단 모퉁이 장식대 위에서도, TV 옆에서도, 장식장 위에서도 목이 빠지듯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어찌 한 통으로 그칠 것인가? 계속 이어진다. 아내가 밟고 다녔을 자리를 따라가며 물을 주고 있다. 계단 쪽 창틀 위 바이올렛한테는 팔을 높이 뻗어 물을 준다. 아내는 이 자리서 까치발을 하고서 물을 주었을까?


‘아, 하!’ 내면의 소리가 들려온다. 아내에게 이런 비밀이 있었네. 매일 남몰래 손길을 주었던 친구들이 참 많다. 매일 이 화분에 물을 주니, 꽃들이 답례로 아내에게 은은한 에너지를 안겨준 것, 아내의 얼굴 꽃이 핀 게 다 이유가 있었네.


실내에 참 많이도 바이올렛이 널려있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쳐서 꽃들의 손짓을 못 봤다. 그런가 보다 했다. 거실, 복도, 계단, 현관에도 돌아다니며 물을 주다 보니 네 통이 금세다. 보라색, 하얀색, 노란색 바이올렛이 함빡 웃고 있다. 대충 봐도 칠팔 십 개쯤 되는 것 같다. 아니 백여 개도 되겠다. 얼추 반 시간은 지난 것 같다. 잎 옆으로 물이 흘러내릴까 봐 왼손으로 잎을 살짝 잡고 그 아래에 정성스레 물을 준다.


가끔 아내가 내 귀 청소를 해줄 때가 생각난다. 아내 무릎에 머리를 베개 삼듯 맡기면 아내는 조심스레 내 머리를 움직여가며 집중했다. 딱 그런 느낌이랄까? 마음을 모아 집중하는 시간이다. 내가 꽃으로 들어가고 있다. 잎을 따라 뿌리로 다시 줄기로 꽃으로 물관을 따라 여행을 하고 있다. 아내의 비밀의 화원, 꽃순이 나라를 구경하면서 보니 입에서 탄성이 나온다. 아내의 빈자리에서 아내가 느꼈을 여행의 진수를 이렇게 깨닫다니… .


“아하, 여기 있었네.!”


택시 운전 시작이 반 시간 늦어졌지만, 새로운 세상을 여행하고 난 기분이다. 운전대 잡은 손이 한결 편안하다. 바이올렛 꽃 기운이 어린 마음도 깃털처럼 가볍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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