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56) 한 새 사람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56) 한 새 사람 <에베소서 2:19~22>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 가운데 라파엘 나달이라는 선수가 있습니다.라파엘 나달은 2015년 독일 슈트트가르트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 대회는 메르세데스 벤츠가 후원하는 대회로, 우승자에게는 상금 외에 벤츠의 AMG GT라는 차량이 부상으로 수여되었습니다. 니달은 벤츠 관계자와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기아차는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차이긴 하네요.” 

  

나달은 열 다섯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프로 테니스 시니어 선수로 데뷔했고 열 여덟살에는 테니스 황제라고 불리우는 로저 페더러를 꺾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후 왼쪽 발목 피로골절이라는 진단과 함께 2004년 대부분의 시간을 부상 치료를 하면서 보냅니다. 이때 나달을 향해 손을 내밀었던 기업이 기아 자동차였습니다. 이후 나달은 승승장구하여 22세에 세계랭킹 1위까지 올라갑니다. 현재 나달은 기아자동차와 21년째, 데뷔초기부터 2024년 은퇴를 앞둔 시점까지 긴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나달의 팬도 아니고, 기아차 광고를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길게 나달과 기아차의 동행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은 그 안에 담겨진 진정성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주어진 형식이나 물건, 그보다 그 안에 담겨진 진정성에 주목을 하기 시작합니다.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냥 교회만 다니는 교인이 아니라, 성도라는 이름에 합당한 마음,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진정성입니다. 오늘 에베소교회를 향한 바울의 편지 속에서도 이러한 진정성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새로운 시대가 온 겁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저 외인이었던, 저 하나님 바깥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졌습니다. 그럼 저들을 향해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말로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를 향한 신앙의 진정성을 담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주를 향해 올려드리는 예배 가운데 진정성을 담아야 합니다. 나아가 신앙의 자리 뿐만 아니라, 세상의 삶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진정성을 담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게 그리스도의 향기요, 그리스도의 편지요, 삶으로 주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담겨진 정신이 이와 같습니다. “진정성”. 그렇다면 진정성을 가진 신앙인으로, “한 새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자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이제부터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본문 19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제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말씀합니다. 앞에서는 여러 가지 대립과 갈등관계를 설명했었죠. “저들이 하나님 안에 있냐? 그렇지 않냐? 저 사람들은 이방인인데, 예수 믿는다고 구원을 받을 수 있냐? 저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 믿음만 가지면 되는 것이냐?” 이는 초대교회의 계속된 논쟁 중에 하나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예루살렘교회에서 이와 관련된 회의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예수님의 수제자로 불리우는 베드로는 이방인을 향한 복음의 역사에 힘을 더합니다. 

  

그럼 이제는 더이상의 논쟁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실제적으로 사람들의 인식과 개념을 하루 아침에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에베소교회는 다수의 이방인과 소수의 유대인이 섞여 있는 구조였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더 큰 위세를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그 자부심 때문이었고, 이방인은 여전히 스스로 부족하다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과 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이에 오늘 바울은 앞서 모든 갈등의 상황에 대해 정리하면서 본문에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너희가 이제는 더 이상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택함받은 성도들과 동일한 천국의 시민권자요 하나님의 권속이다.”

  

마지막에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가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이죠. “권속”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이케이오스”입니다. 집의 모든 하인을 돌보는 청지기가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권속은 “오이케이오스”입니다. 뜻은 집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뉴질랜드광림교회라는 집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 속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다 권속입니다. 뉴질랜드광림교회의 권속입니다. 더 크게 확장시키면, 온 세상의 예수 믿는 모든 자들은 다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가족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들은 서로간에 말하죠. “형제, 자매”라고 말이죠.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임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이제부터는 예수 믿기 시작한 그날부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천국의 시민권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된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족입니다. 함께 영의 양식을 먹고, 육의 양식을 먹으며 교제하는 식구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 알고 있다면, 서로 반목하고 갈등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크게는 하나님 나라의 권속으로서, 작게는 우리 뉴질랜드광림의 권속으로서, 또 더 작게는 각 속회의, 각 선교회의 권속으로서 살아갑니다. 그 삶 속에 진정성을 담으시기 바랍니다. 나와 함께 한 동역자들을 정말 내 가족으로, 영적인 형제 자매로 진정성을 가지고 대할 때에,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앞서 권속이라는 말도 그렇지만, 모퉁잇돌이라는 말도 성경에 언급되는 것에 비해서는 상당히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물론 이와 비슷한 말씀은 더 있습니다. 시편과 복음서,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모퉁잇돌과는 조금 다릅니다. 쓰임새가 다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할 때의 돌은 종석입니다. 마지막 가운데에는 역사다리꼴 모양의 돌이 들어가야 마무리가 돼죠. 그게 종석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은 네모반듯하지 않아 버린 돌이었지만, 마지막 마무리에 그게 딱 필요하기에 모퉁이의 머릿돌에 되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모퉁잇돌은 말 그대로 모퉁잇돌입니다. 영어로 하면 Corner stone입니다.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 모퉁이에 이쪽벽과 저쪽벽을 딱 연결해서 튼튼하게 세울 기초석을 뜻합니다. 오늘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 교회의 기초가 되는 모퉁잇돌이 되셨음을 말씀합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가장 기초가 되는 모퉁잇돌과 같은 존재가 누구냐? 예수님이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심으로 이쪽 저쪽으로 연결하여 한 성전이 되게 하셨음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죠. “내가 친히 모퉁잇돌이 되어서 교회를 세우겠다.” 이를 본문에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전해진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셔서 우리 모두가 성전이 되어 지어져 가고 있다.” 그렇기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는 더 이상 갈등이 필요가 없습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중요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모퉁잇돌이 되셔서 이쪽과 저쪽을 다 붙잡아서 연결하여 하나의 성전을 지어가십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십니다. 그럼 그 속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교회의 기초가 되시는,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모퉁잇돌이 되신다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퉁잇돌이 되시고, 우리는 그 위에 쌓여져감을 통해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를 이루어갑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께서 내 신앙의 모퉁잇돌이심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의 모퉁잇돌이심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진정성을 가지고, 오직 예수님이라는 믿음의 기초 위에 나의 신앙, 우리 교회 공동체, 온 세계 열방의 믿음의 공동체를 견고하게 세워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함께 지어져 가야 합니다. 


김지수 기자가 고 이어령교수를 인터뷰하고 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컵을 보게. 컵은 컵이고 나는 나지. 달라. 서로 타자야. 그런데 컵에 이렇게 손잡이가 생겨봐. 손잡이가 뭔가?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 손 내미는 거지. ‘나 좀 잡아주세요.’라는 신호거든. ‘손잡이 달린 인간으로 사느냐? 손잡이 없는 인간으로 사느냐?’ 그게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이 이야기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가요? 관계입니다. 요즘 세상은 저마다 자신의 손잡이를 없애려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나 혼자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나요? 손잡이를 만들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손잡이를 잡으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데, 이 시간 자체가 함께 주님께 영광돌리는 예배로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애찬준비로 땀을 뻘뻘 흘리시는데, 그 속에서도 여러 레시피와 재료들을 통해서 맛있는 식사가 완성되는 것 자체도 함께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꽂이도 여러 꽃과 잎, 그리고 정성이 녹아져 함께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부서와 기관과 봉사가 다 이와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모습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다른 공간을 살아가도, 서로 다른 생각, 다른 형편에 거하고 있더라도, 누구 하나 자고하거나 낙심하거나 할 것이 없이 서로에게 손잡이를 내밀고, 서로 붙들어 주는 것, 이게 바로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물론 어디에나, 언제나 힘들게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집을 지어가다보면, 좋은 목재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재료도 있거든요. 열심히 일하는 인부도 있지만, 그냥 시간만 떼우려는 인부도 있거든요. 그럼에도 집은 지어져갑니다. 기초가 든든하기에, 부정적이고 불순종하는 이들보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순종하면서 함께 합력하는 분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함께 잘 지어져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 혼자 꼿꼿하면 절대로 함께 지어져 갈 수 없습니다. 나는 수고를 감당하지 않겠다 하면 절대로 함께 지어져 갈 수가 없습니다. 내 생각만 내세우면 함께 지어져 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내가 하나의 돌이 되면 그 위에 다른 돌도 올라갈 수 있는 겁니다. 나도 다른 누군가라는 돌 위에 오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내 옆에 다른 돌과 같은 누군가를 꽉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함께 지어져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도 우리에게 진정성이 필요합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내 옆에 있는 성도님을 향해 손을 내밀고, 나를 향해 내민 손을 또한 붙잡아 주고, 이를 통해 우리 모두가 서로 진실된 사랑으로 연결되어 함께 지어져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드신 존재, “한 새 사람”으로서 진정성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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