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 母 曲

교민뉴스


 

思 母 曲

일요시사 0 216 0 0

어머니가 크리스마스 이브날인 12월 24일 새벽에 돌아가셨다.재작년 대장암 수술을 하실 때 많이 놀라서 그런지 돌아가셨다는 동생의 전화에 그냥 담담했다.올 것이 왔구나,가야겠구나…이런 생각으로 마음이바쁘기만 해서 교회에있다가그냥 집으로 돌아왔다.식구들에게 알리고 발권을 의뢰해서 겨우 발인하는 날 새벽에 도착하는 것으로 티켓을 끊었다.


2018년에 한국을 방문했으니 만 5년이 넘어서 다시 한국에 들어간다.막 2주 휴가를 시작하는 첫날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회사에 다시 알려서 2주 휴가를 3주 휴가로 연장을 했다.대한항공이왕복 3,000불쯤 한다고 했는데 용케누가 캔슬 한 것을 구했고 돌아오는 항공편은 가장 저렴한 날짜로 해서 대충 2,200불 정도 들었다.


출발하는 날,우리집 둘째 사위가 공항으로 환송을 해줬다.뉴질달러를 한국돈으로 바꿨는데 환율이 무지막지하다. 1불에 620원 정도…뭐 조금만 바꾸는 데다가 공항에 있는 은행이니 일반 환전소보다는 좋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여러분께서는 꼭 시중 은행에서 바꾸어 가시라.


연말연시 기간이다 보니 사람들이 비행기에 꽉 찼다.남은 자리가 없다.인천공항 도착해서 공항에서 바로 포항으로 가는 마지막 고속버스가 아슬아슬해서 강남에서 출발하는 밤 12시 고속버스를 예매했다.예매 자체가 한국 모바일 폰이 없으면 불가능해서 포항의 조카가 예매를 해서 나에게 카톡으로 보내어 왔다.


2번 식사를 하고 영화는 3개를 봤다.중간중간 사람들이 컵라면을 주문해서 먹는 것을 보고 저게 그렇게 먹고 싶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한국으로 가는 이유가 여행을 가는 것이고 기쁜 일이었다면 마음이 편하겠지만 그러하질 못하니 모든 것이 시큰둥하다.잠도 잘 오질 않는다. 앞으로 나는한국 갈 일이 없어졌구나,이제 나는 고아 아닌 고아구나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2024년 이후키위 세이버를 찾게 되면 그 돈으로 한국에 들어가서 어머니와 마지막여행을 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다.나는 그게 어머니에 대한 나의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했는데…


인천에 도착했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예전의 동료교사가 픽업을 나온다는 카톡이 떴다.너무 고마웠다.어떻게 또 강남 터미널까지 가나? 했는데…반가운 해후의 모습을 상상하며 출구로 나왔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한참을 카톡으로 어디 있냐?여기 있다,저기 있다,그쪽으로 간다, 등등.그러고 있는데 가만 보니 대한항공의 제2터미널이 아니고 에어 뉴질랜드가 착륙하는 제1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이번엔 모바일 로밍을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픽업 나오는 예전 동료교사와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못해서 이 양반이 올 때까지 한참을 바깥에서 기다렸다.


춥네…도로 가에 눈도 쌓여 있고.환한 대낮에는 인천 공항이 그렇게 번쩍번쩍 호화롭더니 사람들 없고 어두컴컴한 지금 이 시간은 그냥 여느 나라, 여느 공항이나 마찬가지이다.이윽고 후배 교사였던 박선생이 도착.내 또래들은 전부 명예퇴직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가운데 이 양반만 아직 현직이다.같이 강남 터미널로 가면서 5년만에 다시 지나온 서로의 이야기를 했다.나는 한국 이야기를 묻고 박선생은 뉴질랜드 이야기를 묻고…언젠가 미래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화성 이야기를 묻고 상대방은 지구 이야기를 묻는 시대가 오겠지…


이 양반도 강남 터미널이 바뀌고는 여기 온 적이 없었나 보다.터미널 주차장을 못 찾아서 동네를한바퀴 돌았다.예전의 강남 터미널이 시각적으로 운동장이었다면 지금은영화관 수준으로 변했다.앉아서 다음 영화(버스)를 기다리는 영화관의 라운지같다 고나 할까?오늘이 12월 26일 밤이니 터미널은 젊은 청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고마운 마음에 커피라도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으로터미널의 카페에 갔더니 문을 막 닫고 있다.아니 24시간 불을 밝히는 대한민국에서 이게 웬일!


“형,서울 오면 만나요” 라는 말과 함께 이 양반이 떠나고 나는 포항 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마찬가지 버스안에는 무료 와이파이가 흐르고 있어서 심심하지 않게 도착을 했다. 04시경 도착해서 이 곳에서도 마중 나온 친구의 1톤 트럭에 옮겨 타고 장례식장으로 갔다.트럭이 하도 조용해서 뭐냐?했더니 전기트럭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초상이 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집에서 밤을 새우면서 같이 있었고 화투도 치고 술도 마시고 시끌벅적 했는데 요즈음엔 그런 현상이 없어졌다고 한다.넓은 장례식장 룸에는 조카들과 동생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나는 행여나 근조화환이 부족할까 봐 뉴질랜드에서 내가 속해있는 단체에도 연락하고 한국의 동문단체에도 연락했더랬는데 괜히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장례식장 룸에 들어가기까지 수많은 화환이 있었다.그래…내가 한국을 오래 떠나 있었구나,이제는 동생이 그리고 조카들이 이번 장례식의 상주로 바뀌어져 있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우리 어머니의 영정사진을 마주했는데 울음이 나지 않았다.이상했다.웃고 있는 사진속의 어머니는 날 빤히 보면서 어서 산에 가자고 하시는 것 같았다.내가 한국 올 때 마다 어머니는 나와 함께 동네 아침 산행을 즐기셨다.아이고…어머니 제가 왔습니다.이 불효자를 용서하세요…뭘 그리 잘살겠다고 머나먼 뉴질랜드까지 가서 어머니 마음 고생만 시키다가 겨우 발인하는 날 여기 온 게 전부입니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왔다.아침 07:30 이 발인이니 겨우 3시간 남겨두고 왔으니 말이다.좀 있으니 식장의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마무리를 위해 오시고 다음엔 우리 가족들이 아침밥을 먹고 또 그 다음엔 어머니 교회에서 발인을 위해서목사님과 교우들이 오시고그랬다.발인 예배가 있었고 조카들과 그들의 친구 위주로 구성된 운구 행렬이 나가고 우리는 화장장으로 향했다.출근 시간대여서 도로엔 차들로 복잡했고 눈은 없었지만 오늘 12월 27일은 분명 엄동설한의 날씨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도시의 외곽지에 그리고 산골짜기에 화장장은 자리하고 있었다.무표정하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는 반대로 방문객으로 온 왁자지껄한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또 커피를 마시고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드디어 어머니는 우리 곁을 떠났다.어머니 잘 가세요…그동안 저를 키워 주시고,생각해 주시고, 기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더 많은 시간을 어머니와 함께하지 못한 것이 제 가슴에 남아 있네요.어머니께서 저에게 해 주신 것의 1퍼센트도 제대로 보답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어머니.어머니 잘 가세요…그전에 울산의 교장 선생님 내외분이 문상을 오셨다.이분들은 오클랜드의 교회에서 알게 된 분들인데 내가 한국에 오면 내가 찾아가기도 하고 찾아도 오시는 분들이다.인연이란 것이 이럴진대 부모자식 간의 인연이란 얼마나 더 고귀한 것인가…


공원 묘원으로 향했다.차가운 날씨 속에서 인부들은 모든 준비를 마쳐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새파란 하늘과 빛나는 겨울의 태양 아래에서 우리는 어머니를 묻었다.그리고 우리는 또한 각자의 가슴속에 어머니를,할머니를 묻었다.이제 부모님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나와 동생이 집안의 어른이 되었다.조카들이 결혼하면 또 그들의 아이들이 태어날 것이고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갈 때 우리 또한 가게 될 것이다.이렇게 삶과 죽음이 되풀이되면서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


<교민권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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