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64) 내 눈을 열어주소서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64) 내 눈을 열어주소서 <마태복음 20:29~34>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하나인 도마가 없었습니다. 후에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전하자, 도마는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도마는 자신의 의지적인 결담을 담아서 말합니다. “내가 믿지 아니하겠노라.” 이게 도마만의 모습일까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가진 기본적인 생각을 도마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강조할 때에, 확신 있게 표현할 때, 이런 말을 쓰곤 합니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사람들은 누구나 보는 것에 집착합니다. 인터넷에 보면, 수많은 착시현상을 보여줍니다.보인다고 무조건 정확하다 할 수도 없습니다.  마가복음 8장 18절에는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제자리 걸음에 머물러있는 제자들을 향해 안타까움으로 말씀합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직전의 모습입니다. 본문 자체는 두 맹인이 눈을 뜨는 기적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는 여러 기적의 역사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모든 기적 가운데 종결은 본문의 두 맹인이 눈을 뜨는 이야기입니다. 내 눈이 열려질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에 담겨진 구원의 계획, 생명의 역사를 깨닫게 됩니다.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눌 때에, 우리의 눈이 열려지는 은혜의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먼저됨을 사모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 한 부자 청년이 찾아와 묻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신앙적으로 꽤나 존경받을만한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에 청년은 재물이 많은고로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하늘보좌에 앉아 심판할 권세를 얻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을 주십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만족스러웠을까요?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19장 30절입니다. 우리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 30절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어서 20장에 가면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포도원에 가서 허드렛일 하는 겁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오전에, 점심때쯤, 오후에, 그리고 거의 일 끝나기 직전까지 다섯 번에 걸쳐서 품꿈들을데려와 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일당은 모두 한 데나리온.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만을 표하죠. “나는 아침 일찍부터 왔는데, 어떻게 한 시간 일한 사람하고 똑같은 대우를 해줍니까?” 불공평하죠. 하지만 주인은 잘못한 게 없습니다. 분명히 처음 데려올 때부터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거든요. 늦게 온 사람이 은혜를 입은 것 뿐입니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 포도원 품꾼의 비유, 그 마지막 결론이 동일합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도 있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도 있다.” 그럼 먼저 된 자와 나중된 자는 누구인가요? 스스로 먼저된 자로 자부하는 순간 나중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먼저된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모해야할 먼저됨은 내가 나중된 자라고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속에서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주를 향한 사랑과 열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어 그거, 나 다 알아.” 그게 아니라, 매 순간 주의 십자가 부활의 은혜에 새롭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먼저됨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먼저됨이 아니라, 스스로 우월하다 여기는 먼저됨이 아니라, 주의 십자가를 향한 감사에 있어서 먼저됨, 주를 향한 사랑에 있어서의 먼저됨, 주님 앞에 헌신된 삶에 있어서의 먼저됨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먼저된 자로 인정받는, 또한 그 먼저된자로서의 모습을 끝까지 잘 지켜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참된 헌신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19장에 등장한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모든 것을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가 가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을 따라감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 자기 부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부자 청년 역시 자기 부인의 실패로 주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자신의 위치, 힘이라 할 수 있는 “부자”라는 타이틀을 버리는 자기 부인에 실패한 거예요. 이어서 또 말씀했죠.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내가 붙잡고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재물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헌신에는 순수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순수함을 담은 참된 헌신의 모습입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처음 온 사람들은 주인에게 원망합니다.비교의식입니다. 베드로의 말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님! 저 부자 청년은 재물을 포기하지 못했죠. 하지만 우리는 이만큼 헌신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합당한 것을 주셔야죠.”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본전 생각입니다.  이어지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하는 말을 보십시오. 이번에는 아예 당당하게 거래를 제안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본 다른 제자들은 분하게 여깁니다. 비교의식, 본전생각, 다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들의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주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지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예수님께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 저들은 다 댓가를 구하는 신앙입니다. 하지만 지난 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생각의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신앙의 걸음 가운데 참된 헌신의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참된 헌신은 우리 주님과의 거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헌신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헌신, 제 목숨까지도 주를 위해 드릴 수 있는 헌신, 내가 지금 헌신할 수 있음에 기쁨으로 감당하는 헌신, 주님 주신 사랑이 너무나도 커서 감사함으로 올려드리는 헌신, 참된 헌신의 모습으로 참된 주의 은혜를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영적인 눈이 열려지면 따를 수 있습니다. 


오늘 주인공은 두 사람의 맹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은 이 부분을 읽어놓고, 계속해서 앞에 나온 사건들만 말씀드렸습니다. 서론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 모든 사건이 모아져 두 맹인의 치유사건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에 두 맹인을 만나게 됩니다. 저들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져주십니다. 그리고 두 맹인은 곧 보게 되어 예수님을 따릅니다. 앞서 부자 청년, 계명도 잘 준수하였고, 당시의 기준에서 볼 때 신앙도 상당히 좋았다고 할 수 있는 그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그럼 모든 것을 버렸다고 자부하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어떤가요? 하지만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붙잡히실 때, 저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위기의 상황에 무너지는 신앙입니다.  이어서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에 나오는 일꾼들은 어떤가요? 비교 의식에 묶여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높은 자리를 원하는 야고보와 요한은 어떤가요? 섬기려 함이 아닌 섬김을 받으려 하는 신앙입니다. 

    

반면에 마지막에 등장한 두 맹인은 어떤가요? 저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걸을 하여서 겨우 먹고 사는 인생입니다. 하지만 저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꾸짖는 자가 있어도 더욱 간절함으로 주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이어서 저들의 요구를 보십시오.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자신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저들의 자세를 보십시오.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육적인 눈을 감겼으나, 영적인 눈이 떠져 있었습니다. 반면에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 부자청년, 저들은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는 눈은 가지고 있었으나, 영적인 눈이 감겨 있었기에, 진정 예수님을 따라가기에 합당한 모습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말이 있죠. “눈 뜬 맹인이다.” 버젓이 눈을 뜨고 있음에도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켜 하는 말입니다. 잘못된 것 하나만 붙잡고 있는 사람을 가르켜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눈 뜬 맹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영적인 눈이 열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부활의 영광을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열어주신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나의 십자가 사명 감당의 길을 바라보고 나아갈 때에, 부활의 새아침을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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