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84)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84)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에스라 1:1~4>

오늘은 지난 몇 주간 주일마다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었던 이스라엘 왕정역사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난 주에 보았던 시드기야 왕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더불어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 후 백성들은 70년의 포로생활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합니다. 유다의 바벨론 포로 귀환과 성전재건의 역사,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의 성취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레스의 조서로 시작됩니다. 성경의 바사는 페르시아입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함락되어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그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 점령당했습니다. 이제 유다 백성들은 자연스레 바벨론 포로에서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왕인 고레스가 조서를 내려서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최선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그 은혜의 손길은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동일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께서 오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가장 최선의 길로 이끌어주십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우리를 향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그날 저녁에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그런데 그 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요? 도마입니다.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지만 도마와의 일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팔 일이 지나서 도마도 함께 있는 그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금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이에 도마가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내가 직접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 말하던 그 순간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처럼, 그대로 말씀하십니다. 사실 그 안에는 도마의 원망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하필 내가 없는 그 때 오셨는가?” 그렇기에 도마를 위해 한번 더 찾아가십니다. 도마만을 위해서 한번 더 찾아가시사 말씀하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에 도마는 고백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도마를 향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다 백성들의 포로 귀환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속에 있던 유다 백성들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시편 137편 1절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보시고, 회복의 은혜를 내리십니다. 이사야 61장 3절에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 예배할 수 없음에 슬퍼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배를 사모함으로 우는 자들입니다.  마음껏 예배할 수 있을 때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다가, 정작 예배할 수 없는 때가 이르렀더니, 후회하며 탄식하며 울고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우리를 향합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가운데, 예배할 수 없음에 탄식하는 유다 백성들을 바라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도마 한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그 시선이 오늘 우리를 향하고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늘 결단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은 광야와 같은 우리네 인생 가운데서도 눈동자와 같이 지켜보호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언제나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시선 안에서 주의 사랑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십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 설교 본문으로 잡기 상당히 애매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문 전체가 고레스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주를 향한 믿음을 가진 이들과 믿음 없는 이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함께 담겨집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바라보면, 나의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이야기를 담아가는 거예요. 그 모든 걸음이 계속 말씀드린 삶의 흔적이 됩니다. 신앙의 획이 됩니다. 내 이름에 대한 평가가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페르시아의 왕인 고레스의 말입니다. 이방 왕 고레스의 말이 학사로 불리워지는 에스라가 기록한 에스라서의첫문을 여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 고레스에게 모든 나라를 주셨다.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시길 유다 사람들은 다 돌아가서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다. 그러니 유다 백성들은 가서 성전을 건축하되, 남은 백성들은 무엇으로든지 저들을 다 도와주고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바쳐라.” 그리고 중요한 것, 고레스가 이러한 조서를 내린 이유가 1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보세요.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들은 한 것이 없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중에, 자기들을 잡아왔던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로 바뀝니다. 그 속에서 압제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란 말이죠.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됨을 향한 심판의 막대기로 앗수르가, 바벨론이 쓰임을 받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성전재건을 위한 회복의 도구로 쓰임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오늘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의 자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큰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나라와 정치, 모든 질서를 주관하시고 주의 뜻한바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음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위해 쓰임을 받되, 아름다운 이야기, 복된 이야기, 주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는 이야기를 써내려가는데쓰임받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계획은 좋은 것을 넘어 

위대함을 향합니다. 


짐 콜린스라는 유명한 경영 컨설턴트가 쓴 [Good to Great-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비즈니스 서적이 있습니다. 이 책의 첫 번째 챕터가 이겁니다.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 위대함을 이루어가는데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이 좋은 것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제한을 하곤 합니다. “이 정도면 좋은데, 여기서 뭘 더 하냐?” 지금 현재 좋기 때문에, 잘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올라가지 못하고, 더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오늘 포로생활 가운데 있는 유다백성들은어떤가요? 본문에서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고레스의 조서를 듣고나서 “야~! 드디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방의 날을 허락하셨다. 이제 가서 성전을 짓고 나라를 재건하자.” 모두 다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이미 50년이 넘는 시간을 바벨론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나이에 이르러 고향으로 돌아간다? 쉽지 않습니다. 바벨론에서 살아온 세월이 훨씬 더 깁니다.  단순 비교를 해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문명이 발달한 곳이 페르시아입니다. 포로로서 차별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수용소에 갇혀서 강제노동하며 살아가는 그런 환경이 아닙니다. 이제 어느정도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충분히 좋습니다. 그런데 황무지와 같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쉽지 않습니다. 


이쯤되면 돌아간 이들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특별히 제1차 포로귀환을 한 사람들, 약 5만명 정도 되는 숫자인데, 이들은 정말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럼 어떻게 저들은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좋은 것을 넘어서 위대한 것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케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너희를 압제하던 이들은 다 심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들은 새로운 축복의 역사를 만들어갈 것이다.” 좋은 것을 넘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담긴 위대한 역사를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회복을 넘어 축복으로 향합니다. 결핍을 넘어 충만으로 향합니다. 결국은 좋은 것을 넘어 위대함을 향합니다. 

  

우리가 병들어서 아픕니다. 그러다가 잘 치료받고 회복되었습니다. 그럼 좋죠.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이전보다 더 강건함을 향합니다. 사업장을 운영하는데 잘 안됩니다. 열심히 해서 다시 정상궤도에 올라왔습니다. 회복되었습니다. 좋죠.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이전보다 더 큰 번창함을 향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회복되어 좋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축복을 이루어주시는 위대함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을 향하고 있음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좋은 것을 넘어 위대함으로 향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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