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326) 주를 위하여 로마서 14: 7-12
바울은 우리에게 본질과 비본질의 교훈을 전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에는 본질적인 것도 있고, 비본질적인 것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의 일을 해나갈 때도 본질과 비본질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지난 번 웨슬리회심성회 때에 지성업목사님 말씀 전하실 때에, 첫 날 집회에서 그런 질문을하셨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런데 이 대답 이전에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것이 있습니다.
“먼저는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다.’라는 내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다.” 교회에서 내 생각은 비본질이거든요. 교회의 인주은 머리 되신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뜻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가 신앙인으로살아갈 때에, 특별히 교회의 지체로서 살아갈 때에, 가장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가? 우리 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주를 위하여 사는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를 위하여 죽는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 받은 우리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께 속한 자로서의 삶이요, 주를 위하여 살고 죽는 인생이요, 특별히 우리 뉴질랜드광림이라는 행복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될 수 있을까요?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품어 안을 줄 아는 넓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갈 때에,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서로 간에 이해하고 용납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믿음이 강한 자는 연약한 자를 붙잡아주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믿음이
강한 자를 바라보면서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오늘 로마서 14장은 먹을 것에 대한 것과 날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6절 중반에 말씀합니다. 먹든지 안먹던지, 그들의 마음의 중심은 똑같이 다 “주를 위하여!”라는 거예요. 먹느냐 먹지 않느냐가 죄의 기준은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먹는 사람이 먹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야! 너 믿음이 그정도밖에 안되냐?” 비난하면 그 순간부터 죄가 되는 겁니다. 정죄하는 순간, 그때부터 죄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분이 다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내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다보니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서로 비판하고, 나아가 비난하고, 심지어 서로 정죄하면서 죄를 쌓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바울은 그걸 경고하는 것입니다.
독일 속담 중에 이런 게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면, 그 옆에 마귀가 예배당을 세운다.” 무슨 말인가요? 믿음의 백성들이 교회를 세우고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면, 마귀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서 어떻게든 방해를 하려고 한다는 거죠.
마귀들이 얼마나 영리한지, 성도들간에 비본질적인 것으로 갈등을 조장하고, 비난하게 하고, 정죄하게끔 합니다. 혹여라도 교회 내에서, 선교회 안에서, 속회 안에서 비난과 정죄로 인한 갈등이 생겨나려고 하면 그게 마귀의 계략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으로 품어안을 줄 아는 넓은 마음, 그 마음 가지고 주의 사랑 증거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기쁨되고, 사람에게 칭찬받는 삶입니다.
미국의 종교사회학자인 로드니 스타크는 [기독교의 발흥]이라는 책에서 초대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로드니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기독교를 향한 박해가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켰고, 둘째는 기독교인의 구별된 성결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고, 셋째는 기독교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일례로 한 가지 특징적인 사건을 언급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는 큰 전염병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5천명씩 죽어갔고 모두 도시를 떠나 한적한 곳으로 향할 때 기독교인들만 그대로 도시에 남았습니다. 전염될 위험이 있음에도 저들은 다른 병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모습, 교회의 모습, 그 속에 담긴 정신과 삶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되어 있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트리니티 시간에 보았듯이, 로마서는 총 열 여섯장 중에서, 1장에서 11장까지가 이론적인 말씀이고, 12장에서 16장까지는 실천적인 신앙의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관계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왜 그렇게 성도들의 관계성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이 로마교회를 향한 말씀이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의 로마는 세계의 중심입니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다양성 속에 늘 갈등의 불씨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바울은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를 당부합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먼저 아름다운 모습, 덕을 세우는 모습을 가져야, 다른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본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복음의 확장이 이루이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신앙의 모습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이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날마다 믿는 자를 더하게 해주시는, 주를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서론에서 제가 본질과 비본질에 대한 말씀을 드렸는데, 그럼 우리의 신앙의 삶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입니다. 본문 8절과 9절에 말씀하죠. 우리가 주를 위하여 살고 죽는, 그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영광스러운 삶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즉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임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상처에는, 내가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당하신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대속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죄나 빚을 대신 갚아 자유롭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이사야 53장 5절에 내가 당해야 할 찔림과 상함과 징계와 채찍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당하심으로, 나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게 되었음을 말씀합니다. 또한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모든 죄악을, 내 짊어져야 할 죄악의 짐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말씀합니다. 대속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랑은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서 부족한 모습이 보일지라도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무너뜨리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에 흠집을 내는 것은 나의 판단하는 태도, 나의 정죄하는 말, 나의 비난하는 입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기억하는 자, 늘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감사가 내 안에 충만하면, 주변에 좀 부족한 사람이 있어도 비난하고 정죄하기에 앞서 품어안아 줄 여유가 생깁니다.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보이면 시기하고 질투하기에 앞서 칭찬하고 존경할줄 아는 여유가 생깁니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여유있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구원 받은 주의 백성으로서 주를 위하여 살고 있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삶이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이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럼 그것이 곧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영적으로나 삶적으로나, 언제나 어디에서나, 아름다운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를 위하여! 우리가 속한 뉴질랜드광림이라는 믿음의 공동체가 더 아름답고 행복한 교회로 세움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뜻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