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 인문학산책 >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인문학의 태두 " 소크라테스"
__2400년이 지나도 우리에게 말을 거는 사람__
서론: "세상이 왜 이래, 테스형?" - 시대를 초월한 질문
교민여러분 이번주도 평안히 계시죠?
__ <성서와 인문학산책>의 네 번째 여정은 인문학의 태두(泰斗)로 추앙받는 소크라테스와 함께합니다.
지난 몇 년간 고국에서는 국민가수 나훈아 씨의 노래 "테스형!"이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교민 여러분께서도 한 번쯤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노래의 제목 '테스형'이 바로 우리가 오늘 만날 소크라테스를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이라는 것도 잘 아실 겁니다. 노래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__이 가사에는 놀랍게도 <성서와 인문학산책>이 추구하는 바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테스형'이라는 호칭은 2400년 전의 위대한 사상가를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닌, 내 삶의 고단함과 사랑의 번민을 터놓고 상의하고 싶은 가까운 형처럼 여기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또한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익히 알지만, 당장 내 삶의 문제에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막막하고 멀게 느껴진다는 솔직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__이는 인류의 위대한 두 스승, 예수와 소크라테스가 가졌던 본래의 마음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는 산상수훈의 팔복(八福)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산파술(産婆術)'이라 불리는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학자들을 위한 난해한 철학이나 신학을 논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시장 바닥과 광장, 산과 들판이라는 삶의 한복판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로, 소크라테스는 일상적인 '대화'로 진리를 탐구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지만, 그들의 생생한 말은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졌습니다.
__이처럼 본래 삶의 현장에서 출발했던 진리의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왜 그토록 멀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일까요? 나훈아 씨의 노래처럼, 오늘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다시 우리 곁의 '테스형'으로 불러내어, 240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유쾌하고도 깊이 있는 인문학 산책을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아테네 시장의 괴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삶과 인품
__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라는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테네의 번잡한 아고라(광장)를 거닐던 그의 모습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는 조각가인 아버지와 산파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훗날 그가 자신의 철학적 방법을 영혼의 진리를 낳도록 돕는 '산파술'에 비유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의 외모는 흔히 생각하는 위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못생긴 외모 때문에 사티로스(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수)에 비유되기도 했지만, 부(富)에 초연하여 평생 남루한 옷 한 벌로 지냈고, 돈을 받고 지식을 파는 당시의 지식인들인 소피스트(Sophist)들과 달리 가르침의 대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의 교실은 아테네의 시장과 거리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만나는 누구에게나 "정의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철학자, 전사가 되다: 소크라테스의 군대 경험
___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소크라테스는 광장에서 대화하는 지혜로운 노인의 모습이지만, 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바로 중장보병(hoplite)으로서의 군 복무 경험입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스와 페르시아전쟁) 당시 아테네 군인으로서 최소 세 차례의 주요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포티다이아(Potidaea, 432 BC), 델리움(Delium, 424 BC), 그리고 암피폴리스(Amphipolis, 422 BC) 전투입니다.
그의 군인으로서의 모습은 제자들의 기록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특히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테네의 명장 알키비아데스는 포티다이아 공성전 당시의 소크라테스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는 혹독한 겨울 추위에도 맨발로 얼음 위를 다른 병사들보다 더 잘 걸어 다녔네... (중략) 전투 중에 내가 부상을 입었을 때, 나를 버리지 않고 내 목숨과 무기를 함께 구해준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였지."]
__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알키비아데스가 무공훈장을 받도록 장군들에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또한 델리움 전투에서 아테네 군이 참패하여 뿔뿔이 흩어져 후퇴할 때, 모두가 공황에 빠져 달아나는 와중에도 소크라테스는 장군 라케스와 함께 침착하고 당당하게 퇴각했습니다. 라케스는 훗날 "모두가 소크라테스처럼 싸웠다면, 우리 조국은 명예를 지켰을 것이고 그 대패는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용기'란 단순히 전장에서의 무모한 용맹이 아니라, 두려워해야 할 것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는 '지혜'라고 정의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만연한 전쟁터 한복판에서 보여준 그의 초인적인 인내심과 침착함은, 육체적 고통을 넘어선 영혼의 강인함을 추구했던 그의 철학이 단순한 탁상공론이 아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체득한 생생한 지혜였음을 보여줍니다.
소크라테스 문제: 엇갈린 기록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깊이
__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바로 '소크라테스 문제(Socratic Problem)'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직접 글을 남기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의 제자인 철학자 플라톤, 군인이자 역사가인 크세노폰, 그리고 그를 풍자했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기록을 통해서만 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기록은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속 소크라테스는 숭고한 진리 탐구자이자 순교자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반면 ,
크세노폰의 기록 속에서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도덕 교사에 가깝습니다. 심지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에서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며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괴짜 소피스트로 묘사됩니다.
__역사학자에게 이는 '문제'일 수 있지만, 인문학적 산책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는 단 하나의 모습으로 규정될 수 없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철학적 영감의 원천이자(플라톤), 실용적 지혜의 스승이었으며(크세노폰), 동시에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인물이기도(아리스토파네스) 했습니다. 한 인물이 이토록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방증합니다. 그가 어느 한 가지 정답을 제시하는 교조적인 스승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거울로 삼아 스스로를 비춰보게 만드는 '살아있는 질문'과 같은 존재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2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가 여전히 그를 '테스형'이라 부르며 말을 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철학자의 가정: *소크라테스와 크산티페* 이야기의 재해석
__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그의 아내 크산티페(Xanthippe)입니다.
그녀는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 존 웨슬리의 아내 몰리와 함께 '세계 3대 악처(惡妻)'로 손꼽히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전해지는 일화들은 매우 유명합니다. 토론에 빠져있는 소크라테스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다가 구정물을 끼얹자, 그가 태연하게 "천둥이 치더니 비가 오는 것은 당연하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또 어떤 이가 왜 그런 부인과 사느냐고 묻자, "사나운 말을 다룰 줄 알면 다른 말은 다루기 쉬운 법이다. 내가 저 여자를 견딜 수 있다면 세상에 상대 못 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인내심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됩니다.
고뇌하는 아내, 어려운 남편: 크산티페에 대한 현대적 시선
__하지만 이 악처라는 낙인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최근의 연구들은 크산티페의 입장에서 이 관계를 재조명하며 새로운 해석을 제시합니다.
첫째,)크산티페를 악처로 묘사하는 기록은 후대의 것이거나 크세노폰의 기록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정작 소크라테스를 가장 깊이 존경했던 제자 플라톤의 저작에서는 악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플라톤의저서 <파이돈>에 묘사된 소크라테스의 임종 장면에서, 크산티페는 아이를 안고 슬피 울부짖는 평범한 아내의 모습으로 등장할 뿐입니다.
둘째,) 당시 아테네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여성은 교육의 기회도, 사회 활동의 자유도 없이 오직 집안일에 얽매여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생계는 전적으로 남편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어떤 남편이었을까요? 그는 철학적 토론에만 몰두한 채 가족의 생계는 전혀 돌보지 않았습니다. 세 아들을 둔 어머니이자 한 집안의 살림을 책임져야 했던 크산티페의 입장에서, 매일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돈 한 푼 벌어오지 않는 남편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크산티페의 잔소리와 분노는 타고난 악한 성품 때문이 아니라, 극심한 생활고와 사회적 억압 속에서 비롯된 절박한 외침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녀는 '악처'가 아니라 '고뇌하는 아내'였고,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가정의 측면에서는 '악부(惡夫)', 즉 무책임하고 어려운 남편이었던 셈입니다. 이처럼 역사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다시 읽고, 그 시대의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공감해 보는 것은 인문학 산책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 중 하나입니다.
대화로 이어진 황금 사슬: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
__소크라테스는 책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위대한 제자들을 통해 인류의 지적 유산으로 영원 히 남게 되었습니다.특히[ 소크라테스--(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 (플라톤의 제자)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이른바 3대에 걸친 "대사상변천의 황금사슬" 은 성서와 인문학 더나아가 우리인류의 문명과 문화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것은 각계의 전문가,학자들 共히 인정 하는 사실 이네요.
1) * 플라톤* (Plato): 철학적 계승자
__ 소크라테스의 가장 위대한 제자인 플라톤은 스승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서양 철학의 거대한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스승이 사형당하는 것을 목격한 후, 민주주의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이상적인 국가와 정의에 대해 고뇌했습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거의 모든 저작을 '대화편' 형식으로 집필하며, 그 주인공으로 스승 소크라테스를 내세웠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스승의 문답법을 철학적 방법론으로 승화시켰고, 스승이 던졌던 "정의란 무엇인가?", "선(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윤리적 질문들을 형이상학적 '이데아(Idea)론'으로 체계화했습니다. 20세기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했는데 ,
그렇다면 플라톤의 철학은 스승 소크라테스에 대한 깊고 긴 해설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크세노폰* (Xenophon): 실천적 기록가
___ 군인이자 역사가였던 크세노폰 역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습니다.(지난주,'코레스의 교육" 역사서 집필)
그는 <소크라테스 회상(Memorabilia)>과 같은 저작을 통해 스승을 변호하고 그의 가르침을 기록했습니다. 크세노폰이 그린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묘사처럼 형이상학적이거나 아이러니한 인물이라기보다는, 경건하고 애국적이며 실천적인 덕을 강조하는 현실적인 도덕 교사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크세노폰의 기록은 플라톤의 철학적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인간적인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면모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3) 우리에게 친숙한이름인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비판적 상속자
__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의 가장 뛰어난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위대한 철학의 황금 사슬을 잇는 다음 주자였습니다.
그는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하며 현실 세계에 대한 경험적 탐구를 중시했지만, 그의 사유 역시 소크라테스가 제기한 문제들로부터 출발했습니다. 특히 그는 "덕(德)은 지식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논제에 대해 중요한 비판을 제기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무엇이 선한지 알면서도 의지의 나약함(\text{akrasia}) 때문에 악을 행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지성주의에 대한 최초의 심도 있는 반론으로, 그의 철학이 단순한 추종이 아닌 비판적 계승을 통해 더욱 풍요로워졌음을 보여줍니다.
소크라테스의 메아리: 후대에 미친 영향
___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그의 육신을 소멸시켰지만, 그의 사상은 서양 정신사의 가장 깊은 수원(水源)이 되어 끊임없이 흘러내렸습니다.
1)로마의 이상적 현자: 키케로와 세네카
___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로마에 이르러,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특히 스토아학파(2000년간 기독교사상과 더불어 서양의 양대사상으로 지속 되어온 그리스로마철학에 기반을둔,금욕,관용,박애,자기수신, 의무, 책임등의 정신이 주를 이루며, 서양귀족들의 공직자 의무정신인 "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근원이 된 사상의 학파임)철학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가난이나 죽음과 같은 외적인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이성과 덕에 따라 살아간 '이상적인 현자(sage)'의 완벽한 본보기로 숭배했습니다.
__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Cicero,시이저의 친구이자 정치적으로 반대편)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려 인간의 삶과 도덕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 인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___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Seneca)는 폭정과 광기의 시대 속에서, 독배를 태연히 받아들이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최고의 용기와 존엄을 보았습니다.( 본인도 네로가 준 독배를 마시고, 여러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태연히 죽음을 맞이함, 소크라테스죽음과 같음)
3세기에 만들어진 한 흉상은 앞면에는 세네카를, 뒷면에는 소크라테스를 조각했는데, 이는 철학자로서의 세네카가 소크라테스의 이상을 얼마나 깊이 추구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2)아테네의 기독교인 소크라테스! 사도 바울( 성서의 신약성경27권중 13권을 저술한 인물)
___놀랍게도 소크라테스의 영향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도 발견됩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행한 연설(사도행전 17장)은 소크라테스적 접근 방식의 탁월한 예로 꼽힙니다. 신학자 존 스토트목사는 바울을 '기독교인 소크라테스'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___바울은 그당시 기독교인이 보기에 우상이 가득한 아테네에 도착하여, 소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고라(광장)에서 에피쿠로스( 정신적 쾌락주의)학파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과 변론을 벌입니다. 아레오바고에 선 그는 다짜고짜 이교 신앙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도시를 둘러보다 발견한 '알지 못하는 신에게(TO AN UNKNOWN GOD)'라고 새겨진 제단을 언급하며 말문을 엽니다. 이는 상대방의 문화와 종교적 관심사에서 출발하여 공통의 대화 기반을 마련하는 소크라테스적 지혜입니다(상대방의 생각,종교나 문화에 무관심하고 마구잡이식 기독교전도를 하는 현대의 일부 보수기독교인들은 사도바울과 소크라테스의 전도접근방법을 참고할 필요있슴).
___나아가 그는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와 같이 그들의 스토아 시인들의 글을 인용하여,이교도 그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던 우주적 원리(로고스)와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을 연결합니다. 이처럼 공감대를 형성한 후에야 비로소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방식은 특히 외국의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우리 교민들에게 깊은 통찰을 줍니다. 그것은 먼저 듣고, 상대를 이해하며, 공통점을 찾고, 그 토대 위에서 자신의 신념과 자기가 믿고있는 종교를 이야기하는 지혜로운 소통의 모델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사상의 청사진: 교부(로마시대의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과 플라톤 철학
___초대 기독교 교부(敎父)들이 유대 땅에서 태어난 기독교 신앙을 헬라( 그리스)-로마 세계에 설명해야 했을 때, 그들은 소크라테스로부터 플라톤으로 이어진 그리스 철학에서 매우 유용한 지적 도구를 발견했습니다.
플라톤이 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고 완전한 진리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는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영혼 불멸' 사상(<파이돈>: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기록한책 )은 사후 세계와 영생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변증하는 철학적 언어가 되었습니다.
특히 교부 철학을 집대성한 *아우구스티누스*( 불후의 고전 "고백록" 을 저술한것으로 유명함)는 플라톤의 '최고선(最高善)의 이데아'를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철학적 갈망으로 재해석하며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소크라테스-플라톤 철학을 단순히 수용한 것이 아니라,결정적인 지점에서 그것을 '변혁'시켰습니다.
___이지점이 바로 <성서와 인문학산책>의 핵심적인 만남의 장입니다. 아래의 표는 이 미묘하고도 중요한 차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이도표는 조금더 심도깊은 교양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반교양인분들과,독실한 크리스챤분들의 성서를 보는 지평을 넓히는데 참조하려는 목적임으로 가볍게 읽는분들은 pass 바람니다)
< 도표> 소크라테스 철학과 기독교 사상의 만남( 요약표)
구분 소크라테스& 플라톤 로마시대의 초대기독교
궁극적 실재 비인격적'선(善)의 이데아(궁극적진리의 神) 인격적 삼위일체 하나님
인간영혼 신적- 불멸,육체는 감옥 창조된 피조물, 육체와 결합
삶의 목표 이성으로 영혼정화,이데아로 귀환 하나님의 이웃사랑, 믿음으로 영생
사후세계 영혼불멸( 육체로부터 해방), 영혼의 윤회 육신의 부활( 영혼+ 육체 재결합)
진리의 원천 이성적 탐구( 문답법), 상기( 想記) 성서의 신적계시,성육신한 예수
플라톤 사상에서 육체는 영혼이 벗어나야 할 감옥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강했지만 ,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Incarnation)과 '육신의 부활'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궁극적 소망은 영혼만의 탈출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모두 구원받아 온전한 인격체로서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이처럼기독교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변혁시키면서 자신의진리를 세워나갔습니다.
결론: 21세기, 왜 우리는 여전히 "너 자신을 알라"고 해야 하는가?
___아테네의 시장을 거닐던 한 괴짜 철학자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산책은 로마와 예루살렘을 거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가 정답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__이제 나훈아씨가 부른곡 < 테스형> 의 가사중에서 " [* 너자신을 알라며 툭내뱉고 간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의 답을줄 시간이 되었네요~
그의 가장 유명한 격언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 말은 단순히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라는 뜻을 넘어섭니다. 이것의 정확한 의미는.....
첫째,) 지적 겸손을 의미합니다.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라는 그의 고백처럼 ,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배움과 대화의 출발점입니다.
둘째,) 도덕적 용기를 의미합니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그의 말처럼 ,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의 삶과 신념, 편견을 끊임없이 검토하고 반성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셋째,)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삶을 의미합니다.즉, 자신의 앎과 지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지일관
자신의 실천행동과 일치해야 하는 삶을 뜻합니다. 그는 불의를 행하느니 차라리 당하는 것이 낫다고 믿었고, 아테네의 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친구들의 탈옥 권유를 뿌리치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마지막 유언: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__플라톤의 <파이돈>에 기록된 그의 마지막 순간은 그의 인간미와 철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독약을 마신 후, 그는 친구들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조용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몸이 점점 마비되어 갈 때, 그는 마지막 힘을 내어 덮고 있던 천을 걷고 친구 크리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__"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부디 잊지 말고 갚아주게."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으로, 당시 사람들은 병이 나으면 감사의 제물로 닭을 바치곤 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이 마지막 말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그가 '삶'이라는 기나긴 병에서 이제 '죽음'을 통해 치유되었으니, 의술의 신에게 감사를 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을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과정으로 보았던 그의 철학을 보여주는, 심오하고도 아이러니한 유언입니다. 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유머와 지혜를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__정보의 홍수와 극심한 이념 대립, 그리고 날로 변화되는 문화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하는 우리 현대인, 특히 영어권 문화에서 살아가는 우리교민분들에게 소크라테스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비판적으로 사고하고,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그의 방식이야말로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의 중심을 잡고, 타인과 더 깊이 소통하며, 의미 있는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가장 확실한 나침판이 되어 줄것 입니다.
부록: 소크라테스의 지혜: 좋은 삶을 위한 인류에게 준10가지 금언
* 너 자신을 알라. (나의 무지를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것을 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것도 모른다< 無智의 智, 無智의 無智>
*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원문: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의미를 묻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다.)
*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적인 교만을 경계하고 언제나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 덕(德)은 지식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진정으로 안다면, 선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믿음.)
*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가 직접 한 말이라는 증거는 없으나 , 불의한 판결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법질서를 존중하여 탈옥을 거부한 그의 정신을 상징하는 말로 전해진다.)
* 가장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진정한 부는 소유가 아닌 마음에 달려 있다.)
*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인생의 핵심이다.)
* 나는 살기 위해 먹지만, 어떤 이들은 먹기 위해 산다. (삶의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지 말라는 경고.)
* 결혼하라.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 ( 악처 크산티페에 대한 유명한 일화에서 나온 말로, 어떤 상황에서도 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유머와 지혜를 보여준다.)
* 죽음이란 육체로부터의 해방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혼의 불멸을 믿었던 그의 철학적 신념을 보여주는 말.)
홍영표
연세대 졸업, 연세대 경영대학원 졸업.(M.B.A)
한신대 신대원 M,div 졸업( 신학석사),
한신대 대학원 박사과정( P.H.D)수료
오클랜드 한인회장, 대양주한인회 총연합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