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의 일상톡톡; 이꽁찐, 반꽁찐, 중국인 암호 주문 -헬렌스빌 노천 온천, 웃음꽃 필 무렵

교민뉴스


 

백동흠의 일상톡톡; 이꽁찐, 반꽁찐, 중국인 암호 주문 -헬렌스빌 노천 온천, 웃음꽃 필 무렵

일요시사 0 7 0 0

지금과 여기

헬렌스빌의 노천 온천은

차가운 공기와 뜨거운 물이 만나는

그 경계의 촉감이 가장 좋다

머리는 서늘하고, 몸은 뜨끈할 때

그럴 때면 인생의 복잡한 매듭도

“아, 뭐 그렇게 심각할 것도 없었네” 하며

슬그머니 풀리는 기분이 든다

김이 오르는 온천 물속에

두 남성 시니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온천장 야자수를 보며, 특별한 말 없어도

괜히 허허 웃음이 새어 나오는 오후였다

“좋구먼, 지금 자네 오늘 얼굴이 아주 훤해졌어”

여기(Here)가 어깨에 물을 끼얹으며 말했다

“물 좋고 공기 좋으니 안 그렇겠나

그런데 사실은 말이야

물보다 마음이 더 시원해서 그래”

지금(Now)이 수건을 머리에 얹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오호라” 여기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또 무슨 재미있는 일 있었구먼”



패킨세이브, 중국 여성 손님들의 암호 주문

“나 요즘 말이야”

지금이 물결을 살짝 밀어대며 입을 열었다.

“마켓 시푸드 파트에서

‘중국 아줌마 암호 풀이 전담가’로 통하잖아”

“허허, 자네 별명 하나 늘은 건가”

여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패킨세이브에 중국 손님들 참 많잖아

특히 연세 있으신 아주머니들

영어는 거의 못 하시고 목소리는 크게

다짜고짜 중국어로 주문을 쏟아내시거든”

“그렇지” 여기가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이에 외국말로 장보는 거,

주문해서 사는 것 때로는 쉽지 않겠지”

“무대포로 쏟아내는 일부 중국인들의 주문

‘몰라몰라몰라’처럼 들리는 중국어를

키위 스탭들이나 한국 스탭들은 알아듣질 못하니까

듣다못해 손을 저으며 이렇게 말하기도 하지”

“‘아엠 낫 차이니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닌데”

안타깝다는 투로 여기가 말했다.

“그건 서로 벽 보고 이야기하는 격이지.”

지금이 그때를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표정들 보면 말이야, 괜히 가슴이 좀 그래”

여기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도 나이 들수록 느끼잖아

영어로 말 안 통할 때 그 답답함이라니”



마법의 단어, 이꽁찐과반꽁찐

“그래서 내가 입사 동기 중국 스탭한테

물어봤지” 지금이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어르신들 새우 코너에 와서 주문하는 것 

보통 새우 1kg 아니면 500g이잖아

그걸 중국어로 뭐라고 하냐고”

“그래서 중국인의 반응 결과는?”

여기가 성급하게 기대하듯 물었다

“간단하더라고, 딱 그 두 마디야”

지금이 그때를 생각하며 웃었다

“1kg은 ‘이꽁찐’ 500g은 ‘반꽁찐’”

그날 지금은 속으로 그걸 외워두었다

예상대로 중국 아주머니 한 분이

또 요란하게 중국어를 쏟아내셨다

주변 스탭들은 서로 눈만 마주쳤다

그때 지금이 아주머니와 눈을 딱 맞추고

조심스럽게 천천히 힘주어 말했다

“이꽁찐? 반꽁찐?”

“오, 그래서?”

여기가 궁금증에 채근하듯 물었다.

지금을 보며 물속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주머니 눈이 말이야.”

지금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아주머니가 번쩍하더니

‘이꽁찐!’ 하고 웃으시는 거야”

“허허허.”

“나도 신이 나서

‘이꽁찐!’ 복창하면서

새우 1kg을 아주 좋은 걸로 골라 담아드렸지”

멀리서 그 장면을 보던 매니저가

엄지손가락을 이만하게 치켜세우잖아

“그 엄지 하나에 하루 피로가 싹 가시더라고”

지금이 고마운 표정으로 웃었다

여기도 덩달아 기분이 올라갔다



“당신, 중국인 아니에요?”

“거기서 멈췄으면 지금 자네가 아니겠지?”

여기가 웃으며 다음 말을 기대했다

“맞아, 여기 자네는 역시 ”

지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성격 자네도 알잖아 궁금한 건 못 참는 것”

횟감 코너에서도 마찬가지였지

키위들은 회로 먹을 수 있냐며

“필렛? 사시미 그레이드?”

나름대로 이렇게 묻는데

일부 나이든 중국 손님들은

알아듣든 못알아 듣든 다짜고짜

중국어로만 ‘몰라몰라몰라’ 해대는 것보니

“연어 몇 조각, 스내퍼 몇 조각

달라는 눈치인 것 같더라고.”

그래서 중국인 동기에게 물었지

이럴땐 뭐라고 말하는지

말해준 걸 받아 쓰고 또 외웠지

몇 도막인가요? 야오 찌 꽈?

한 조각은 ‘이꽈’,

두 조각은 ‘량꽈’

배운 걸 그날그날 써먹는 재미

그런게 또한 쏠쏠하더라고

어느 날은 중국 손님이 이렇게 물었어

“당신, 중국인 아니에요?”

그럼 그냥 맘씨 좋은 아저씨처럼 웃는 거야

지금이 여유롭게 말했다

“말은 한두 마디인데, 그 한마디 중국에도

사람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니까

그게 그렇게 좋더라고.”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하기 나름

여기가 머리에 온천수를 끼얹으며

온천장 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자네 참 재미있게 사네

나이 먹었다고 밖에 안 나가고

뒷방 늙은이처럼 있는 게 아니라,

일터에서 그 짧은 한마디로

마음 답답해 하는 사람 마음을 얻잖아”

지금과 여기 사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물소리만 조용히 숨을 골랐다

“있잖아, 우리 지난번 말한 거,

행복은 일상의 사소한 것 하나에서

나오는 세로토닌 호르몬 반복이라고”

지금이 천천히 말했다.

“이제 와서 깨닫는 건데,

세상을 바꾸는 건

대단한 말이 아니라

딱 알아들을 만큼의 말인 것 같아.”

여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맞아

긴 영어 못해도 적재적소의 

스몰토킹이면 다 통하잖아

그리고 그런 여우와 감정은 

항상 ‘지금’이랑 ‘여기’에서 나오지”

노천 온천 위로 하늘 향해 

김이 천천히 올라갔다.

사라지는 하얀 김처럼

지나간 시간도 아쉬움도

즐거움도 고마움도 가볍게 흩어졌다.

지금은 여전히 여기 있었고,

여기는 지금과 함께 있었다

오늘도 쎄로토닌

이꽁찐 1kg, 반꽁찐 500g,

웃음 사발 한 대접

이 정도면 그 나름 하루하루로

여유롭게 충분히 잘 보내는 건가

나이든 중국 아줌마의 소리가

스르르 귓전을 울려왔다 

‘몰라몰라몰라’ *


----------------------------------------------------------------------------------


수필가 백동흠 

수필 등단: 2015년 에세이문학. 수필집: 아내의 뜰(2021년). Heavens 지금여기(2022년). 수상: 2017년 제 19회 재외동포문학상 수필 대상 (깬니프!). 2022년 제 40회 현대수필문학상 (Heavens 지금여기).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