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z역사] 제임스 쿡 선장 – 뉴질랜드를 영국의 땅으로

손바닥소설


 

[Nz역사] 제임스 쿡 선장 – 뉴질랜드를 영국의 땅으로

일요시사 0 2443

제임스 쿡 선장 – 뉴질랜드를 영국의 땅으로

 
뉴질랜드를 최초로 발견한 유럽인은 네덜란드인일지 모르지만, 뉴질랜드를 점령한 건 영국인이었다.

1769년 10월 6일 제임스 쿡 선장은 유럽인으로는 사상 두 번째로 (1642년의 아벨 타스만이 최초) 뉴질랜드에 도달했다.

요크셔의 마톤 마을에서 태어난 쿡의 아버지는 남의 농장에서 일을 하는 날품팔이였다. 쿡은 아버지의 고용주의 도움으로 지역 학교에서 5년 간 공부한 뒤 1741년부터 농장 관리인이 된 아버지를 도왔다. 농장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산을 오르며 모험과 탐험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1747년 18살 때 쿡은 휘트비에서 바닥이 평평한 배에 석탄을 싣고 영국 해안을 따라 수송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쿡은 선장이 될 수도 있었지만 영국 연안 항해에 만족할 수 없었다. 1755년 6월 7일 그는 영국 해군에 자원 입대했다. 2년 뒤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에 도착해, 겨울을 보내는 동안 측량사 새뮤얼 홀랜드에게 지도 제작법을 배웠다. 1768년에는 인데버호의 총 책임자가 되어 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항해했다. 금성의 태양면 통과를 관측하는 것이 임무였다. 쿡은 첫 대서양 항해 때 괴혈병으로 26명이 사망한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전통적으로 제공하던 소금에 절인 쇠고기 대신 소금에 절인 양배추나 홍당무 잼 같은 식량을 많이 실었고, 채소를 먹지 않는 선원은 채찍질로 징계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1769년 1월 탐사대는 남미 대륙의 남쪽 끝을 돌았고 타히티에 내려 관측소를 설치하고 임무를 완수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쿡이 비밀 임무가 담긴 봉투를 열자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 “남극 대륙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라.”

쿡은 남쪽으로 향하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뉴질랜드로 향했다. 뉴질랜드가 남극 대륙의 일부가 아닐까? 쿡은 뉴질랜드가 남극 대륙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남북으로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한 뒤 호주로 향해 그 동부 해안을 탐사했다.

남태평양의 지리에 상당히 밝은 ‘트우파이아’라는 타히티인의 도움을 얻어, 쿡은 뉴질랜드에 도달했다. 쿡은 몇 가지 작은 오류(뱅크스 반도를 섬으로 하고, 스튜어트 섬을 남쪽의 일부로 생각)를 빼고는 뉴질랜드 해안의 거의 완벽한 지도를 제작했다. 또한 뉴질랜드 남북섬을 나누는 해협(쿡 해협)을 발견했다

쿡 선장은 성공적으로 뉴질랜드를 주항했으며 지도를 작성했다. 그의 식물학자들과 다른 전문가들이 그의 함선 인데버 호(the Endeavour)에 같이 승선하였으며, 뉴질랜드의 식물군과 동물군, 그리고 마오리 원주민에 대한 상당한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쿡 선장은 1779년에 하와이의 해변에서 살해되기 전까지, 두 번 더 뉴질랜드를 찾았다.

1840년 이전에는 주로 고래잡이와 물개잡이, 그리고 선교사들만이 뉴질랜드에 왔다. 이들 정착자들은 특히 해변 지역에서 마오리족과 상당한 접촉을 했다. 마오리족과 파케하(유럽인)는 광범위한 교역을 하였으며, 몇몇 유럽인들은 마오리족들 사이에서 함께 살기도 했다.

1840년 이전에, 뉴질랜드에는 약 2천명의 파케하가 있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살았다. 이 시기에는 마오리 부족간의 충돌이 잦았고, 이에 따라 마오리족이 파케하로부터 사들인 총의 유입으로 인하여 이 전쟁은 더욱 위험해졌다. 무기의 유입과 파케하가 옮겨온 질병으로 인하여 결국은 마오리 인구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그들의 수는 급격하게 감소하게 되었다.

1840년 와이탕이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영국으로부터의 이주민들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뉴질랜드의 구조적인 식민지 개척은 대부분 에드워드 기본 웨이크필드(Edward Gibbon Wakefield)의 아이디어에 의해 기초되었으며, 그는 식민지의 개척은 영국사회의 구조를 모델로 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많은 뉴질랜드의 도시들과 마을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설립되고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문명화를 추진하고, 적은 수의 농부들이 자신들의 땅을 개간하는 자급자족적 문화를 형성한 동시에, 원주민들과 영국인이 함께 평화로이 살 수 있도록 계획 되어 졌다.

더 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오고, 그들이 땅을 더 요구함에 따라 마오리족과 영국인 사이에 땅 분쟁이 증가하게 되었다. 와이탕이 조약의 애매 모호한 해석과 지지의 결여로 인하여 불만이 증가했고, 사소한 충돌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 결과, 1840년대 중반에 북섬에서 큰 규모의 전쟁이 일어났으며, 다른 지역들에서는 1860년대에 전쟁이 있었다.

땅에 대한 전쟁 동안 마오리족은 많은 접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북섬의 오해와이 파 (Ohaewai Pa)의 방어같은 몇몇 전쟁에서 마오리족의 전술은 상당히 교묘함을 보여주었고, 종종 유럽인의 전술보다 우세했다. 그러나, 식민지 군대는 그 수가 많았기 때문에 숫자의 힘에 의해 뉴질랜드의 전쟁은 마오리족들의 패배로 끝이 났다. 머지않아, 정부는 와이카토와 타라나키의 우수한 땅들을 포함하여 마오리족 땅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고, 많은 땅의 손실과 계속적인 질병으로 인해 마오리족의 인구는 급격하게 감소하여, 1900년에는 겨우 4만 여명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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