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Z역사] 와이탕기 조약 (2)-영어버전과 마오리 버전의 해석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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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Z역사] 와이탕기 조약 (2)-영어버전과 마오리 버전의 해석 차이

일요시사 0 2517

와이탕기 조약 (2)
영어버전과 마오리 버전의 해석 차이

마오리족이 조약서에 서명 한 까닭...

와이탕기 조약의 내용은 단 세 가지 이다.
 
제1조 : 마오리 부족장들은 모든 주권을 영국 여왕에게 이양한다.
 제2조 : 영국 여왕은 부족들이 소유한 것을 필요할 때 언제나 독점할 수 있다. 부족이 토지를 팔 경우에도 영국 여왕이 제일 먼저 살 권리가 있다.
 제3조 : 영국 여왕은 원주민을 보호하고, 영국인과 같은 권리를 부여한다.

즉, 이 조약으로 인해 마오리족은 치안을 영국에게 부탁하는 대신 통치권을 영국에게 맡기면서, 뉴질랜드가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된 것이다.
1830년대, 영국인들과 평화롭게 교역을 하였고,
1835년엔 자주국가를 선포했던 마오리족이, 갑작스레 찾아온 홉슨이 내민 조약서에 서명을 한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유럽 이주민들은 마오리족의 토지를 대거 사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이 경쟁적으로 토지를 사면서 뉴질랜드를 식민지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또, 죄를 지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영국인들이 뉴질랜드로 건너와, 마오리족들을 학살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당시 영국에서 관리가 파견되어 있긴 했지만, 이를 제지할 직접적인 권한은 없었다.)
마오리족 고유의 토지소유권과 생존권이 위협받자 마오리족 족장들은 문제에 대한 책임이 영국인들에게 있다고 여기고, 영국인들에게 그 의무를 수행하길 바랐던 것이다.
마침, 영국도 프랑스에게 뉴질랜드를 빼앗길 것 같아 불안해하던 중이었다. 이 기회에 뉴질랜드에서 영국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싶어했다.
이처럼 양자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와이탕기 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영어버전과 마오리 버전의 해석 차이

이 시대에 이루어진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들 사이에 사인된 조약들과 계약서들이 거의 대부분 잊혀진 반면에 와이탕기 조약은 아직도 뉴질랜드의 법과 사회의 중심으로서 남아있다. 이 조약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국가의 건국 문서로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 조약이 사인된 이래, 와이탕기 조약의 해석에 있어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영어와 마오리 족의 언어로 된 이 조약은 모두 3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조약이 법률에 관한 경험이 조금밖에 없거나 아니면 아예 없는 사람들에 의해 씌어지고 번역되었기 때문에, 마오리족의 번역은 영어버전과 해석에 있어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첫번째 조항은 통치권에 대해 나타내고 있다. 영어 버전에는 마오리는 그들의 '카와나탕아'(통치권 또는 통치 직위)를 영국 황실에 넘긴다고 명시되어 있고 마오리 부족의 버전에는 권력을 공유한다고 되어있다.
두번째 조항에는 '티노랑아티라탕아' 또는 족장제도에 연관되어 있다. 마오리 부족 버전에는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타옹아'(보물) 소유에 대한 더 넓은 권리를 약속하고 있으며, 영어 버전에는 마오리들의 땅, 숲, 어장, 그리고 다른 부동산에 대한 통제권을 주고 있다. 그러나, 마오리족 버전에는 '타옹아'라는 말의 사용에 있어 언어와 문화같은 것들의 소유와 보호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세번째 조항은 마오리족에게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권리를 보호함과 동시에 모든 영국의 것에 대한 권리도 약속하고 있다.
와이탕기 조약이 뉴질랜드의 '건국 문서'라고는 하지만, 조약에서 마오리족에게 약속되었던 많은 권리들이 사실상 무시되어졌다. 와이탕기 조약에서 제시된 보호에도 불구하고, 마오리들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상당한 양의 땅을 잃었다. 땅을 잃은 방식이 종종 의심스러웠으므로, 이는 마오리들의 심한 저항을 이끌어냈다.

처음엔 족장들에겐 단순히 치안에 대한 책임을 묻고, 토지 거래에 대한 조약으로만 여겨졌던 이 조약이 영국의 식민지 정책인 것으로 드러나자, 마오리족은 영국을 상대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고, 그들이 자치권을 획득하는데까진 67년(1907년 자치령이 되면서 실질적 독립)이 걸렸고, 현재 뉴질랜드에서 마오리족의 입지는 매우 축소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서에 대한 내용과 영국의 행동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조약 체결 당시 마오리인은 단지 거래에 대한 내용으로만 이해하였으나 이후 내용의 부당함을 깨닫고 땅을 팔지 않거나 영국 정부의 통치를 거부했다. 그러나 1860년대 2차례에 걸친 내전 발생 이후 1890년대에는 마오리 소유의 토지가 뉴질랜드 전체 토지의 6분의 1 이하로 줄어들었다.

와이탕기 법정

1975년에 정부는 와이탕기 법정을 설립하였다. 이 법정은 와이탕기 조약을 의미 있고 살아있는 문서로서 존중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설립 이후로 와이탕기 법정은 마오리 이위(부족, iwi)들이 제기하는 많은 요구들에 대해 판결을 내렸고, 많은 경우 금전적인 지불이나 땅의 형태로, 보상이 내려졌다.
지난 10년동안, 정부와 주요 이위(부족)사이에 큰 사건이 많이 성사되었으며, 보상의 많은 부분이 부족민들의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투자되었다.

그럼, 와이탕기 조약의 어떤쪽의 해석이 맞는걸까? 답은 양쪽 모두 맞다 이다. 이는 양쪽 버전 모두에 사인이 되었고, 와이탕기 법정이 의사 결정을 할때 양쪽 모두의 문장을 참고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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