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만 남겨라

손바닥소설


 

발자국만 남겨라

백동흠 0 1515


발 자국만 남겨라”
뉴질랜드 트램핑의 첫 계율이다. 초보 산행길에 산행 리더가 강조한 당부다.
산에 가져온 것은 돌아갈 때 다시 모두 가져가야 한다.
사과 먹고 난 뒤 남는 깡치나 바나나 껍질까지도 버려선 안된다. 어떤 예외도 없다. 철저하다.
등산 산행인 들의 준칙이다. 오직 남겨두고 갈 것은 자신의 발자국 뿐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다. "발 자국만 남겨라." 남겨둔 발자국은 길을 만든다.
새로운 길도 결국은 발자국들이 남긴 흔적이다.
그 발자국은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내어주는 선배들의 안내판이다.
그 뿐이다.
 
고국 지리산 계곡 산행 실태 뉴스를 우연히 보니 참 다른 세상이다.
등산 행락객들이 많이 찾는 쉼터가 몸살을 앓고 있단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오물들로 자연이 손상되고 있다는 뉴스다.
매년 200 여 톤 이상의 쓰레기가 수거되고 있다고 한다.
 
오클랜드에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좋은 일은 놓치지 않고 접해 보는 일상!
주중엔 각자 일에 몰입하고 주말엔 취미 생활이나 운동으로 함께 몸과 맘을 푼다.
토요일이다. 대 자연속에서 심신에 자유를 주는 몸풀기 시간이다.
이민 초기엔 골프,낚시에 섭렵한 편인데 요즘엔 트램핑 등산에 빠지고 있다.
이제 좀 몸에 익혀져 마음이 가뿐하다. 내가 발딛고 있는 이 자리에서,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과 함께,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기쁨과 평화를 얻는 일…
등산을 오니 살아있는 세상에 아름다운 것, 세 가지와 함께 하게 된다.
그 하나 나무, 그 하나 물, 그 하나 좋은 일에 몰두하는 사람…
이 셋을 만나는 트램핑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 세상 나들이다.
천년은 됐음직한 카우리 나무가 나무로 보인다. 끊임없이 흐르는 계곡물이 물로 보인다.
땀 흘리며 걷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인다.
 
오늘 코스는 와이타케레 산줄기에서 가장 높은 산 트윈 피크스 트랙이다.
약 5시간 30분이 소요되는 약간 험한 코스다.
지난밤 쏟아진 폭우로 온 산이 젖어있고 복병처럼 수렁이 숨어있다.
산행 리더가 한 말씀 한다. “ 오늘은 어째 힘 좀 쓰게 생겼어요.”
아니나 다를까, 오르막 내리막 좁은 소로길이 질어서 엉망진창이다.
울창하게 얽히고 섥힌 나무줄기를 헤치며 거북이 걸음이다.
 
몸도 낮추고 고개도 숙이고 앉다시피 쪼그려 경사진 진창길을 헤쳐 나간다.
서너걸음 폭의 젖은 수렁길을 건너 뛰다가 그만 미끄러져 뒤로 벌렁 넘어지니 아찔하다.
간신히 나무 줄기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리니 영락없는 타잔이다.
온 몸이 땀투성이인데다 옷도 진흙으로 뒤범벅이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들 하는가. 산행 한 번씩 하고 나면 확 비워지는 느낌, 그 맛 때문일까.
한 주일 동안 몸과 맘속에 쌓인 피로 독소와 스트레스,필요 이상의 욕심 응어리가
말끔히 분출되는 비움이 그리도 상쾌할 수가 없다. 바닷가 태풍이 세차게 휩쓸고 지나간 뒤 끝 같다.
바닷속이 완전히 뒤집혀 새 물갈이가 된 상태다.
 
힘겹게 오르내리고, 폴짝 뛰다 엉금엉금 기기도 한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땀에 눈이 쓰릴 때도 있다.
경사 내리막길에 힘 받은 무릎이 덜덜 떨리기도 한다. 힘든 만큼 가슴 확 트이는 시원함도 있다.
땀 흘리며 산 등성 올라설 때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한 줄기 구원이다.
우거진 나무 가지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에 산란하는 녹초록 잎들의 아름다운 환호성은 그 어떤가.
보이지 않은 계곡 물소리의 청정한 기운은 천당에라도 다다른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무거운 몸과 불편한 맘을 비워주고 청정함으로 깨끗이 채워 준다.
그 비워내고 채워지는 순환에 길들여지니 사서도 고생을 한다.
 
트램핑 떠나기 전날 금요일 밤이면, 소풍가는 마음처럼 설레고 기대도 부푼다.
당연히 깨끗하게 온몸을 샤워 하면서 몸과 맘을 가다듬게 된다.
묵묵히 고갯길을 지나 산을 넘고 내리막길에 계곡물을 건너다 뚝뚝 떨어지는 이마의 땀방울…
온몸에 쌓여 완전 연소된 침전물이 헹궈지며 속이 비워지는 시간…
단순히 걷는 일에만 몰두하게 된다.
이해도 없다. 타산도 없다. 목적도 없다. 그저 맡기고 걸을 뿐이다.
세상이 떠나가고 자연이 들어온다. 자연이 말 걸어온다. 듣는다.
두팔 벌려 서걱이는 나뭇잎 기도, 흐르는 계곡물의 도란 도란, 새들의 나들이 수다,
스쳐 지나는 한 줄기 바람의 여운…
땅도 듣고 하늘도 내려다 본다.  그 뿐이다.
 
한 고개 넘어 걷는 모든 산행길은 발길 내딛는 사람의 흔적이다.
걸으면서 이미 걸었던 사람들과도 만나게 된다.
묵묵히 걸으면 장차 뒤에 올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 길이 유지되고 다져진다.
우리 인생사가 끝이 없는 길이라면 우리는 어떤 길을 내는 데 동참하고 있는가.
두고 두고 남아지는 길은 어떤 길일까. 어떤 발자국을 남길까.
큰 사람(위인偉人)의 길만은 아닐 것이다. 성공이 끝이 아니다.
사람다운 사람( 위인 爲人)의 길이면 족할 듯 하다. 이젠 행복이다.
우리 뉴질랜드로의 이민 길은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택한 것이다.
 
도덕경에서 노자가 제시한 인생길의 세가지 보배를 호흡하며 걷는다.
죽어도 죽지 않는 길은 ‘자비’와 ‘검소’와 ‘겸손’을 호흡하는 인생길이란다.
성큼 성큼 발길을 옮길 때마다 이미 온 몸과 맘은 자연을 주워 담고 있다.
자연을 닮아 가고 있다. 자연의 말 소리를 듣고 있다.
그 소리가 가슴을 통해 나오면 그게 곧 글이고 행동이고 우리네 인생이다.
가볍고 살가운 호흡이고 느낌이다.
마음을 도닥여 주는 시인과 함께 걷고 있다. 시인은 나직이 얘기한다.
“자연이 말하는걸 받아 적는 것, 그것이 글이다.”(섬진강 시인 김용택).
트램핑은 ‘자연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 것’을 덤으로 받는다.
 
언제 부터인가 길을 걷는 사람들이 참 좋게 보인다.
찬 공기 쌔한 새벽녁도 그만이다. 움직임이 활기찬 한낯도 어울린다.
일 마친후 평화로운 저녁도 좋다. 시간을 늘려 정기 산행은 진국이다.
이제 주말 산행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일상 생활에 지친 외로움을 채우려는 탈출구이다.
주말 산행이 끝나면 내면의 속살이 튼실해지고 건강한 느낌이 든다.
한 주간의 일상에 쉼표를 찍고 숨고르기 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시간이다. 
자칫 아무도 챙겨주지 못하고 지나면 나만 힘들고 외로운 법이다.
이런 나를 내가 챙겨주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함께 산행을 하다가도 혼자서 묵묵히 오래 걸으면서 나만의 세계도 갖는다.
그땐 나 스스로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몰입하는 기쁨까지 맛 본다.
혼자만의 시간속에 잔잔한 행복감에 젖어 들기도 한다.
 
나한테 편안한 것이 상대에게도 편안하다
"발 자국만 남겨라." 뉴질랜드 트램핑의 첫 계율을 다시금 새겨본다.
내 편리한 것이 남에게 불편함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내가 있으면서 남도 함께 있는 세상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은 우리를 부르고 있다. 우리 마음에 자연을 담기를 바라고 있다.
산행이든 바닷가든 동네든 이제는 걷기가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걷기는 나이 들어가는 중년 이후의 사람들에게 건강을 위해서도
좋은 습관이다. 거기서 또 다른 나를 만나고, 자연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
저마다의 건강한 발자국을 남기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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