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손바닥소설


 

<글의 향기를 나누며 17> 고백

오문회 0 1526
<글의 향기를 나누며 17> 고백

 

 늦은 밤, 턱을 괴고 빈 벽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습니다. 선인들도 저마다 가슴과 마음에 맺힌 응어리들을 자신의 밖으로 드러내어 풀어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누구는 노래를 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돌을 쪼기도 했겠지요. 글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가슴에 담긴 것들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많은 고민의 과정에서 짧은 글, 중간 글, 긴 글로 나누어졌을 것이고, 그것들은 다시 시, 소설, 희곡, 수필 같은 형식으로 태어났을 겁니다.

 자신의 속내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고, 드러나지 않은 작품을 보면서 또 얼마나 많은 좌절을 하고 고민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발전해 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을 참으면서, 가족들의 가난을 보면서, 수많은 밤을 새우면서 글을 썼을 것이고, 그동안만이라도 그들은 분노를 삭일 수 있었고, 열등감을 잠시 잊지 않았을까요. 정교한 문양의 양탄자를 짜는 사람처럼, 돌을 쪼아 탑을 쌓는 석공처럼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어려운 과정들을 견디며 참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상업적인 유통이나 물질적인 보상을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와 명분으로 글을 쓴다고 생각합니다. 울분, 억울함, 열등감, 복수를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또 근육을 뚫고 나오는 끼를 감당하지 못해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삶의 근본적인 의문에 대해 답을 찾거나, 뭔가를 통한 경험이나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서 글을 쓰시는 분도 계시고요.

  저의 경우는 열등감이었습니다. 한글을 깨쳤다는, 한낱 지푸라기 같은 기능에 기대어 저는 책을 읽었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운전을 하고 가다가 담배 겉종이에 쓰기도 하고, 신문지 여백에 쓰기도 하고, 아이들이 쓰다 남긴 공책에 끄적거리기도 했습니다.

 제 글에는 제목도 없고, 형식도 없고, 상대도 없고, 그렇다고 내용도 없었습니다. 일기도 아니고, 편지도 아니고, 잡문도 아니었습니다. 정작 토해내고 싶었던 열등감과 억울함, 울분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저 애매모호한 단어들과 그들의 엉망진창인 나열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었던 것이지요. 이미 부질없는 수작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 저는 오망을 떨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갔고 몸은 늙어 갔습니다. 제게는 달리 뾰족한 방법을 찾아낼 지식이 없었습니다. 초조하고 절박했던 저는 앞사람들의 발자취를 흉내 내기로 했습니다. 그저 쌓이고 쌓인 울분이 하도 많아서, 억눌렸던 열등감의 무게가 하도 무거워서 저는 분량이 많은 소설을 택했습니다.

 저의 글쓰기는 불에 데인 망아지 같았습니다. 방향도 모른 채, 목적지도 모른 채, 입은 옷 그대로 먼 길을 나선 꼴이었지요.억지를 부려가며 글을 썼는데, 만신창이가 되어 마침표를 찍었는데, 제 글은 소설이 아니었습니다. 그 글 속에는 제가 없었습니다. 그저 아이고 아파, 하고 징징거렸을 뿐이었습니다.

 고치고 고치고 또 고쳤습니다. 몇 번이나 다시 썼습니다. 많은 시간을 그렇게 녹였습니다. 그제서야 소설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최소한의 객관적인 확인일 뿐, 성취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겨우 표현했고, 어렴풋이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가망 없고 속절없는 글쓰기에 지쳐 갈 즈음이었습니다.

 

 그들이 제 글을 보고 소설이 아니라고 했을 때, 예전의 저는 그것이 왜 소설이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습니다. 내 열등감을 대신하는 주제가 저의 글 속에 녹아있지 않았음을, 제가 소설이라고 들이대는 그 글 속에 울분을 갈음하는 절실함이 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래서 소설이 아니라고 했구나, 라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고, 그들은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했던 것이었지요. 전달의 실패가 아니고 표현의 잘못이었습니다.

 하나의 묶음으로 마감된 자신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한 번도 만족하지 못하였고, 하고자 하는 말을 다했다고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번번이 아쉬움과 자책으로 제 머리를 쥐어박았습니다. 먼저 쓴 글에서 저를, 저의 속내를, 저의 열등감을 충분히 쓰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아마 또 그럴 겁니다. 제가 저의 피해의식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고, 저의 글을 읽고난 누군가가, 이 사람이 열등감 때문에 많이 아팠구나 하고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또 어리석음을 달랠 만한 다른 쓸거리를 찾아 헤맬 것이고, 달빛 어스름한 창가에 원고지를 펴놓고 펜 끝에 잉크 한 방울을 찍어서, 머릿속 같이 하얀 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겁니다.

 몸은 허물어지고, 머리는 잘 돌아가지 않고, 눈조차 침침해져서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노동이지요.

 밤이 깊었습니다. 두서없었습니다.

 

작업실_오클랜드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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