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열전(1-3)대한국제물류 홍승필 대표

손바닥소설


 

뉴질랜드 이민 열전(1-3)대한국제물류 홍승필 대표

일요시사 0 2410



빗길 뚫고 무지개 너머 새 나라로, NZ 한인물류업계 1위 꿰차
남 밑에서 이삿짐 작업 한 달 만에 레인보우운송 설립…일취월장하며 8년 뒤 대한국제물류 인수 

 <지난 호에 이어>
 2002년 1월 말, 오클랜드로 돌아온 나는 백수가 됐다. 새들의 경쾌한 노래도, 나뭇잎의 격정적인 춤도, 키위들의 다정다감한 인사도 내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시간을 죽이려 낚시를 가도 바늘 끝에는 허망한 세월만 걸렸다. 그러기를 몇 개월. 어떻게 하든지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한 주 380달러 집 렌트비가 하루하루 목을 조여 왔다. 알뜰살뜰하기 그지없었던 아내는 80센트짜리 라면 하나를 들었다 놨다 했다. 하나뿐인 아들, 정윤이에게 맛있는 과자 한 봉지 사 줄 돈이 없었다. 남자로서, 아니 한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한없이 부끄러운 때였다. 한국 나이로 겨우 마흔에 불과했다. 그 나이에, 그 젊은(?) 나이에 나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싶지 않았다.
 

시급 8달러짜리 일도 인터뷰에서 탈락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교민 신문에 나온 구인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내게 마땅한 직업도 별로 없었지만, 영어도 안 되고 남이 생각하는 나이도 있어서 일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가 운이 좋게 한 업소에서 인터뷰부터 해 보자는 연락이 왔다. 내심 기뻤다. 근사한 외식은 못 해도 정윤이 과자는 사줄 수 있는 돈은 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이 드셔서 서빙 할 수 있겠어요?”
 주인 여자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모욕적인 투로 한 얘기는 아니었다. 그냥 내가 걱정돼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오클랜드 시내 중심에 있었던 한 한식당에서 치른 인터뷰는 그렇게 아쉬움만 남겼다. 10대, 20대나 하는 음식점 서빙을 나이 마흔에 할 수 있겠느냐, 는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시급 8달러짜리 일도 퇴짜를 맞았다. 그게 내가 맞닥뜨려야 했던 냉엄한 현실이었다.

 며칠 뒤, 다른 업체에 전화했다. 힘을 쓰는 일이었다. 비록 내가 불혹에 이르렀지만, 깡다구 하나만큼은 있다고 늘 믿어왔기에 그 어떤 힘든 일이라도 할 자신이 있었다. 이삿짐 운송 일이었다. 내 몸값은 시급 10달러였다.
 아침 일찍 이사할 집에 도착했다. 이삿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비지땀을 흘리며 나르고 또 날랐다. 일을 시작한 지 한두 시간도 안 돼 심한 허기가 몰려왔다. 평소 아침을 잘 안 먹는 습관 탓도 있었다. 그렇다고 남 앞에서 힘 빠진 티를 낼 수도 없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열 손가락에 악을 모았다. 잠시 쉬는 시간, 나는 슬그머니 화장실로 숨었다. 이삿짐 사장은 물론 집주인에게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냄새 나는 화장실에서 나는 속울음을 한 움큼 삼켰다.
 첫날 나는 세 건의 이삿짐을 해냈다. 여덟 시간이 넘는 중노동이었다. 이 세상에 이렇게 힘든 일이 또 있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샤워하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났다. ‘내일 해는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러나 다음 날 집 앞 아름드리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는 눈치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 거실 창 너머에는 해님이, 아니 해놈이 예의도 없이 방실방실 웃으며 떠올랐다.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가야만 했다.

 

땀 흘린 대가, 첫 주 현금 500달러 받아
 
그렇게 일주일을 이삿짐과 씨름했다. 내 샅바 끈이 몸에 서서히 붙었다. 어떤 집은 더 큰 집으로 옮겨 행복해했고 또 어떤 집은 작은 집으로 옮겨야만 해서 슬퍼했다. 그러나 나는 같은 질감으로 힘들고 또 힘들 뿐이었다. 그나마 위안은 닷새 일이 끝난 뒤 얻은 땀의 보상이었다. 현금 500달러가 내 손에 쥐어졌다. 눈물 없이는 얘기할 수 없는 피땀 같은 돈이었다. 나와 아내는 슈퍼마켓에 들렀다. 라면 다섯 개짜리 봉투를 카트에 담았다. 정윤이를 위해 과자도 몇 개 샀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돈이 남았다. 나도 웃고 아내도 웃고 정윤이도 활짝 웃었다. 나는 내심 기뻤지만, 이 기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이삿짐 일을 몸으로 직접 하면서 느낀 게 하나 있다. 정직한 땀은 정직한 결과를 얻는다는 점이었다. 내가 흘린 땀과 내가 받는 돈은 정비례했다. 정확히 흘린 만큼 돌아왔다. 보름 정도를 하다 보니 내 마음속 한 구석에서 내 비즈니스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멍가게라도 내 일이 하고 싶었고 나도 사장님이란 호칭으로 불렸으면 했다. 10년 전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자연스럽게 얻은 사장 자리 말고, 내 힘으로 쟁취한 멋진 사장이 되고 싶었다.
 한 달 뒤인 2002년 8월 어느 날, 나는 사장이 됐다. 회사 이름을 ‘레인보우 운송’으로 정했다. ‘무지개 운송’,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깔이 저 동산 위에 반원을 그리며 뉴질랜드 곳곳을 날아다니길 꿈꿨다. 가진 돈을 탁탁 털고 또 이곳저곳에서 조금씩 빌려 6톤짜리 중고 트럭 한 대를 샀다. 이미 12만 km를 뛴 거친 놈이었다. 직원도 ‘무려’ 두 명이나 뒀다. 나는 이제 뉴질랜드 땅에서 이삿짐 세상을 지휘하는 운송계 홍 장군이 된 것이다.  

 사장 취임(?) 첫 행사는 오클랜드 티 아타투 페닌슐라(Te Atatu Peninsula)에서 치렀다. 유학생 이삿짐이었다. 서너 시간이나 힘을 썼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내 비즈니스였기 때문이었다. 시동이 한 번 걸리자 가속도가 붙었다. 교민 신문에 큰 광고 한번 제대로 낸 적도 없는데 손님이 무섭게 들어왔다. 때마침 장기사업비자를 받은 교민들이 구름처럼 벌처럼 몰려와 너도나도 특수를 누렸지만, 우리만큼은 못했을 거로 생각한다. 제발 좀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는 엄살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8월에 시작한 내 비즈니스는 이사 계절인 뉴질랜드 여름 12월과 1월을 거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했다. 나를 포함해 두세 명의 직원이 하루도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일해야만 했다. 내가 전에 직원으로 일할 때 받은 주 500달러는 돈도 아니었다. 주당 380달러 집 렌트비는 시쳇말로 껌값이었다. 라면을 상자로 살 수도 있었고, 과자만으로 카트를 가득 채워도 하나 겁날 게 없었다. 적어도 돈 걱정만큼은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운송 일을 한 지 벌써 13년이나 되어간다. 초창기에는 직접 내 몸을 썼지만 5년 전부터 주로 사무 일을 본다. 큰 그림을 그려가며 회사가 어떻게 가야 하는 지를 늘 생각한다. 가끔은 길 위에서 땀 흘리던 그때가 그립다. 몸은 한없이 불편했지만, 정신은 한없이 편했다. 반면 지금은 뉴질랜드 한인운송업계에서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으나 그 반대 상황에 이르렀다. 몸집이 좀 더 커진 사장이 감당해야 할 짐이라고 믿는다.
 

겨울철만 되면 비가 올까 노심초사해
 
이삿짐 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경험도 기뻤던 경험도 많았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며 내 나름의 시간 여행을 해보고 싶다.
 해밀턴에서 오클랜드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트럭에는 두세 집의 짐이 섞여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지나가던 차들이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이상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내 차 뒷부분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급하게 차를 길가에 대고 뒷문을 열었다. 공기 때문인지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나는 겁도 없이 트럭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내 딴에는 한번 불을 꺼보겠다는 뜻이었지만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직원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내 몸 어딘가도 흠이 생겼을 것이다. 이삿짐은 순식간에 엉망으로 변했다. 트럭도 완전히 망가졌다. 몇 시간 뒤, 견인차가 와 트럭을 끌고 갔다.

 그 외에도 소소하게 힘들었던 추억은 많다. 침대를 들다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주인과 승강이를 벌인 일, 식탁 유리가 와장창 하고 깨져 손을 다친 일, 무거운 짐을 나르다가 오른쪽 발이 크게 뒤틀린 일……. 어느 누군들 그 비슷한 어려움이 없었겠느냐마는 유독 힘을 많이 써야만 했던 나로서는 그때마다 일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힘든 시간이기도 했다.
 아, 또 하나 말할 게 있다. 겨울철 이사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뉴질랜드 겨울철에는 비가 많이 온다. 지긋지긋하게도 많이 내린다. 살 속을 파고드는 겨울의 찬 공기가 비에 섞일 때면 제아무리 좋은 뉴질랜드라고 해도 만사가 귀찮아진다. 그렇다고 맡겨진 이사 일을 안 할 수도 없다. 그러다 보니 아침만 되면 창밖을 보는 게 습관이 됐다. 내 기분이 날씨에 따라 웃고 울었다.

 주룩주룩 비가 내려도 그날 주어진 일은 어떻게든 끝내야만 했다. 온종일 비를 맞아가며 이삿짐을 나르다 보면 비가 나인지 내가 비인지 모를 정도로 신세가 처량했다. 그래도 나 아니면 그 많은 짐을 누가 옮겨줄까 생각하며 허리를 곧추 세웠다. 그렇게 내 사십 대가 한 해 두 해 순금처럼 단련되어 갔다.
 반면 기뻤던 일도 있다. 웰링턴에서 오클랜드로 오는 장거리 이삿짐이었다. 밤새 달려 아침에 웰링턴에 도착했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이밥에 고깃국이었다. 종종 햄버거나 샌드위치, 음료수 같은 간단한 음식을 대접하는 고객들은 있었지만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식사를 준비한 고객은 처음 만났다. 내게는 천사로 보였다.

 포만감을 느끼며 감사를 표시한 뒤 “오클랜드에서 뵐게요”하며 인사를 건넸다. 두세 시간쯤 됐을까. 휴식도 할 겸 휴게소에 트럭을 세웠다. 그런데 저 멀리서 어떤 사람이 손짓했다. 바로 그 천사였다. 우연히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쉬게 된 것이다. 차 시동을 걸고 막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그 천사가 날개 같은 흰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올라가다가 먹으라는 것이었다. 봉투 안에는 초콜릿과 음료수 등 주전부리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나는 눈물이 났다. 군것질보다 그 따듯한 마음에 목이 메었다. 지금 다시 만난다면 정말로 감사 표시를 하고 싶다.

 또 한 번은 로토루아에서 오클랜드로 올 때 벌어졌다. 집주인이 포장 이사를 원했다. 가구는 대부분 이탈리아 제품이었다. 침대나 식탁이 3, 4천 달러는 족히 넘어 보였다. 부자라는 뜻이다. 오클랜드에 도착해 이삿짐을 내리는데 느낌이 안 좋았다. 대리석 식탁 모서리가 깨져 있었다. 내 딴에는 잘 챙긴다고 했지만 흔들리는 트럭 안에서 물건끼리 부딪치다가 상한 것이다. 속으로 ‘오늘 이사 헛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비는커녕 오히려 변상을 해줘야 할 판이었다. 순간 맥이 푹 빠졌다.

 솔직히 얘기했다. 그러자 집주인 남자가 “홍 사장, 돈 있어? 물어줄 거야?”하며 되물었다. 장난기 어린 표정에서 변상은 안 해줘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런데……. 이사비 외에도 300달러를 더 얹어 주었다. 팁이었다. 내게는 남자 천사였다. 3년 뒤, 그분 집을 한 번 더 해 드렸다. 그때도 천사의 모습을 보여줬다. 잊지 못할 분이다.

 

길 위에서 사십 대 황금 시절 다 보내

 길 위에서 황금 같은 내 사십 대를 다 보냈다. 내 피와 땀이 뉴질랜드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 사이 아이 둘이 더 태어나 나는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한때 젊은 사장으로 잘 나가던 아들이 뉴질랜드까지 와서 험한 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어머니도 그사이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내가 길을 떠날 때면 늘 안쓰러워하셨다. 어떻게 하든지 뭘 하나 내 입에 넣어주고 싶어 했지만 퉁명하기 그지없었던 나는 그 사랑을 애써 외면했다. 피곤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암으로 고생하실 때 일을 조금 덜고 옆에서 조금 더 돌봐줬더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마음 한구석이 후회로 가득 차 있다.

 더니든에서 오클랜드까지 올라오는 이삿짐을 실은 적이 있다. 편도만 1,400km. 쉬운 말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만큼의 거리였다. 빈 트럭으로 갔다가 꽉 채운 트럭으로 와야 하는 코스였고 무려 왕복 3,000km나 되는 멀고 먼 길이었다. 4박 5일 그 길을 내달렸다. 그림엽서 같은 풍경으로 둘러싸인 뉴질랜드 산하가 힘들고 지친 내 이민생활의 시름을 덜어줬다. 좀 무료하다 싶을 때 바다가 보이면 트럭을 세워 낚시도 했으며, 쉽게 볼 수 없는 멋진 장소가 나타나면 잠시 내려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뉴질랜드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삿짐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운치 있게(?) 즐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제 다시는 맛볼 수 없는, 힘들었지만 슬펐던 추억거리였다.  
 처음에는 큰 차를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집 앞에 주차해 놓았다. 이웃 주민이 한두 번은 봐주다가도 그다음에는 시청에다 불법주차 신고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빈터에 버려진 고아처럼 트럭을 갖다놓고 밤새 아무 일이 없기를 애타게 기도했다.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면 저녁까지 주야장천 일만 해댔다. 졸음운전을 해가며, 타이어 펑크를 숱하게 내가며 일하고 또 일했다. 트럭이 한 대, 두 대 늘어났으며, 은행 잔액에 숫자 영(0)이 하나씩 더해졌다. 오클랜드 서쪽 끝, 쿠메우(Kumeu)에 멋진 집도 한 채 샀다. 이제는 좀 생활이 안정되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전쟁놀이가 제대로 하고 싶어졌다. 그때까지 초급 장교를 갓 벗어난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면 이제는 좀 중령이나 대령 같은 중량감 있는 영관급 장교가 되어 보고 싶었다. 지휘봉을 들고 ‘나를 따르라’하며 명령하는 내 모습이 상상이나마 멋져 보였다.   
 2010년, 나는 드디어 새 작전을 책임 진 지휘관이 되었다. 오클랜드 핸더슨에 있던 대한국제물류(Corea International Limited)를 떠맡았다. 200평 공간을 발판으로 나는 사방에 흩어져 있던 적지를 정복해 나갔다. 내가 맘껏 내세울 수 있는 무기는 꿈과 깡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나 자신의 지휘 능력을 테스트하는 전장에 서게 됐다.<다음 호에 계속>

구술_ 홍승필 / 정리_ 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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