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열전(3-1) 권영진 대표

손바닥소설


 

뉴질랜드 이민 열전(3-1) 권영진 대표

일요시사 0 3431

뉴질랜드 이민 열전(3-1)

모스번(Mossburn) 휴게소 권영진 대표 


일요시사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뉴질랜드 이민 열전 싣는다. 뉴질랜드 이민 역사에서 10 이상 길을 걸어온 사람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공과(功過)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견해가 있을 있다. 하지만 기록을 통해 뉴질랜드 이민사가 새로운 시각에서 읽히기를 바란다. 역사는 기록하는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편집자>

 

고독한 시베리아의 범’, 왜 오지에 묻혀 살까

잘 나가던 병원 사업 순식간에 망해

남섬 퀸스타운에서 차로 90분 거리에 터 잡아

 


2학년으로 올라갔을 때였어요. 어느 날 한 해 위 선배가 명색이 목사가 된다는 놈이 청바지를 입고 다녀서야 되겠느냐며 훈계를 했어요. 나는 젊은 혈기에 반발했지요. ‘아니  목사하고 청바지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따졌어요. 평소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불만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지요. 그 날짜로 학교를 그만뒀어요. 좀 웃기긴 하지만 결국 청바지 때문에 내 인생이 바뀐 거지요.” 

 

첫눈에 풍운아처럼 느껴져, 인상도 비범해

 ‘순간 포착-세상에 이런 일이.’

 한국 SBS에서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 이름이다. 벌써 환갑을 넘긴 임성훈과 새침데기 미녀 박소현이 진행하는 이 프로는 1998년 첫 전파를 탔다. 스무 해 가깝게 한결같이 텔레비전 화면을 장악한 이유는 그만큼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방증이다. 등장인물은 아주 유별나거나 괴팍한 사람들이다.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보기 힘든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나는 이 프로를 보면서 , 세상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있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눈치 있는 사람들은 짐작했겠지만 50대 중반부터 60대 중반까지의 남자들이 대부분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 인생을 한 번 멋지게(?) 살아보겠다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다가왔지만, 볼 때마다 묘하고도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 줬다. 그러면서 나도 언젠가 한번 저런 인생을 살아야 할 텐데…’ 하는 부러움을 갖게 됐다.

 지난 7월 말, 나는 34일 일정으로 퀸스타운행 비행기에 올랐다. 두 시간에 걸친 비행 끝에 공항에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칼바람이 몰아쳤다. 남극 빙하의 공기라도 밀려왔는지 남섬의 추위를 순간 실감했다. 트랩에서 내려 대기실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입구 바로 앞에 베레모를 쓴 한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눈에 그는 풍운아처럼 보였다. 인상부터 비범했다. 배낭 하나 걸머지고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오클랜드에서 취재 온 나와 기 싸움을 벌이기라도 하는듯 싶었다. 나는 파카 점퍼를 목까지 끌어 올렸다. ‘세상에 이런 일이…’, 그렇다. 퀸스타운에는, 아니 뉴질랜드에는 이런 일(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독자들에게 알려주어야만 했다. 그와 함께한 72시간을 여기에 기록한다.      

 고등학교 시절, 오랜만에 보는 교련복이 정겹다


한국 사람 한 명 없는 곳에서 13년째 살아

 권영진. 그는 퀸스타운에서도 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모스번(Mossburn)이라는 작은 도시에 산다. 도시라고 할 수도 없다. 그냥 시골 마을이라고 하는 게 어울린다. 한국 사람은 권 씨 가족 외에는 한 명도 없다. 현지 주민도 기백 명에 불과하다. 한국으로 따지면 오지 중의 오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곳에서 13년째 살고 있다. 그의 직업은 휴게소 대표이다. 쉽게 생각해 좀 규모가 큰 데어리 숍(Dairy Shop) 주인이라고 보면 된다.

 “날씨가 꽤 춥네요.”

 내가 인사치레로 말을 건넸다.

 “이 정도 날씨면 봄날이지요. 며칠 전만 해도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맹추위가 기승을 부렸어요. 박 선생이 좋은 날 온 거지요.”

 그는 이 정도 날씨는 추위 쪽에 끼지도 못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서 교통사고 얘기를 덥석 꺼냈다. 한 주 전, 그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밤늦게 운전하다가 차가 빙판에 밀려 전복된 것이다. 차는 폐차됐지만, 다행히 몸은 무사했다. 그는 마치 잘 모르는 동네 사람이 겪은 일이라는 듯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풍찬노숙을 숱하게 경험한 독립투사처럼 한 치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시베리아의 범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퀸스타운 한 건물. 한때 이 건물에서 권 씨는 사업을 했었다


1954년 뒤주 보관했던 방에서 태어나

 권영진은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첫울음을 터트렸다. 태어난 곳은 감자나 고구마를 넣어두던 뒤주가 있던 허름한 방. 전쟁 후라 너나없이 다 가난할 때였지만 그의 집은 유독 더 초라했다. 큰아버지 집에 얹혀사는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가난이 죄는 아니었지만, 가난밖에 기억나지 않는 어린 추억은 조금 서글펐다.

 초등학교 4학년, 영진이의 나이 열 살 때 그의 가족은 강원도 철암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공기조차도 깜장 색인 탄광 도시였다. 아버지는 그곳 막장에서 탄을 캤다. 오로지 가족들 입만 생각했다. 먹고 사는 일이 정말로 힘든 시절,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거룩한 희생을 보여줬다.

 어린 영진이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철암에서 마쳤다.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 영진이를 대처로 유학 보내고 싶었다. 그게 그 당시 아버지가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이었다. 조금 잘 나가는 또래 친구들은 인근에 있는 원주로 떠났다. 공부를 비교적 잘했던 까까머리 영진이는 선생 눈에 뜨여 서울로 보내졌다. 종교 재단이 운영하는 학교였다.

 삼육고등학교 3년을 기숙사 생활을 하며 보냈다. 대학도 같은 재단 소속, 삼육대학교였다. 학과는 신학과. ‘피안의 세상을 위해 한목숨 바치는 고귀한 성직자(목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던 성직자는 그다음 해 산산조각이 났다. 발단은 우스개 같은 해프닝 때문이었다.

 “ 2학년으로 올라갔을 때였어요. 어느 날 한 해 위 선배가 명색이 목사가 된다는 놈이 청바지를 입고 다녀서야 되겠느냐며 훈계를 했어요. 나는 젊은 혈기에 반발했지요. ‘아니 목사하고 청바지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따졌어요. 평소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불만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지요. 그 날짜로 학교를 그만뒀어요. 좀 웃기긴 하지만 결국 청바지 때문에 내 인생이 바뀐 거지요.”

 

성직자 꿈 접고 영화배우의 길로 나서

 본의 아니게 성직자의 꿈을 접게 된 그는 정반대인 영화배우의 길로 나섰다. 서울 대한극장 옆 5층에 있는 한 극단 사무실에서 오디션을 봤는데, 덜컥 합격해 버렸다. 1,200명 가운데 40명에 들어 예비 영화배우가 된 것이다. 그때 심사위원장이 박노식, 심사위원이 도금봉, 허장강이었다. 다들 내로라하는 배우들이었다.

 “스튜디오 안에서 매일 연기 수업을 받았어요. 지금은 나이가 들어 좀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미남 축에 들었고 또 화면발도 잘 받아 좀만 버티면 한 자리 차지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도저히 못 견디게 하는 게 있었어요.

 바로 단장의 쌍욕이었어요. 그쪽 계통에서는 욕이 없이는 대화가 안 됐어요. 신학대학 다닐 때는 전혀 못 들어본 괴상망측한 욕 때문에 결국 여섯 달 만에 배우 꿈도 접었지요. 유명한 영화배우가 됐을지도 몰랐을 텐데 말이지요.”

 그다음 선택한 것이 방사선사 면허증. 1970년대 중반, 당시만 해도 막 태동한 분야라 인기가 좋았다. 면허증만 취득하면 서울대 병원 등 어디든 취직할 수 있었다. 신흥보건전문대 방사선과 제1회 졸업생. 그는 졸업 후 8년간 휘경동에 있는 서울 위생병원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4년 후 삼육대학교 간호학과로 편입해 간호사 공부를 했다.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간호학을 들었다. 미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나이팅게일 모자는 쓸 수 없었다.

 월급쟁이 생활이 맘에 차지 않았는지 어느 날 느닷없이 잘 다니던 병원을 그만뒀다. 그리고 사업을 하나 차렸다. 병원이었다. 꼭 계급으로 따질 것은 아니지만 간호사, 의사보다 더 높아 보였던 병원 이사장이 맘에 들었다.

 

방사선 기계 앞에 선 권영진


국제종합검진센터 열어 돈 긁어모아

 지금으로 치면 벤처사업이라 할 수도 있는 국제종합검진센터를 열었다. 방사선사 면허증을 갖고 있어 그 분야에서 어떻게 사업을 펼쳐야 하는지 충분히 알았다. 서울 시내 방사선과 가운데 스물여섯 번째로 간판을 올렸다. 2년 만에 보험청구액이 5위 권에 들 정도로 잘 나갔다. 병원 이사장 권영진은 막말로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다.

 그런데 결국 욕심이 화를 불러일으켰다. 사업 확장을 위해 무리하게 첨단 기계를 들여오면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됐다. 일본에서 전신단층 촬영기, 초음파 촬영기 등을 수입해 왔다. 개발리스 값으로 애초 6억을 신청했지만 승인이 난 것은 25천만 원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순전히 병원 이사장이 짊어져야 할 몫이었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면서 운영 자금이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버티다 버티다 못해 검진센터를 포기했다. 일 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인생의 무대에서 병원 이사장역할을 맡은 권영진의 영화는 짧았다.

 고급 룸살롱을 출근하듯 다니며 숱한 돈을 뿌리던 그는 삼십 대 중반의 삶을 그런 식으로 아쉽게 정리해야만 했다. 마음이 한없이 뒤숭숭했다. 친구가 살고 있던 태국 방콕으로 떠났다. 머리도 식힐 겸 해서 갔지만, 그의 머릿속은 흰 도화지처럼 하얬다. 젊은 나이에 겪은 실패치고는 너무 큰 실패로 느껴졌다.

 그러나 친구가 있었다. 친구도 보통의 친구가 아니었다. 태국 한인여행업계에서 가장 잘 나가던 친구였다. 게다가 그의 부인은 태국 왕족이었다. 오랜 친구가, 그리고 그의 부인이 권영진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틈만 나면 책상 구석에 앉아 태국어 공부에 매진하던 그에게 어느 날 친구가 물었다.

 “영진아, 뉴질랜드 한 번 가 볼래?”

 서너 차례 현지 방문을 하고 온 친구가 뉴질랜드 여행 사업 가능성을 믿고 제안했다. 뉴질랜드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권영진은 한 마디 토도 없이 대답했다.

 “언제 떠나면 되지?”

 1991 12, 권영진은 배낭 하나 메고 혈혈단신으로 오클랜드에 도착했다. 12월의 크리스마스, 상식적으로 전혀 어색하면 안 되는데 이상하게 이글거리는 햇빛 아래 반바지 차림을 한 선남선녀들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남의 땅에서 치른 신고식치고는, 웃지도 울 수도 없는 한 컷의 영화 장면 같았다. <다음 호에 계속>

_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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