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열전 3-2 권영진 대표

손바닥소설


 

뉴질랜드 이민열전 3-2 권영진 대표

일요시사 0 2626


일요시사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뉴질랜드 이민 열전 싣는다. 뉴질랜드 이민 역사에서 10 이상 길을 걸어온 사람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공과(功過)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견해가 있을 있다. 하지만 기록을 통해 뉴질랜드 이민사가 새로운 시각에서 읽히기를 바란다. 역사는 기록하는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편집자>



IMF 사태 2주 후, 화이트보드에 방문팀 숫자 ‘0’

퀸스타운, 중국, 로토루아 돌아 다시 퀸스타운으로

깊은 산 속에서 10년만 조용히 살아 보겠다결심

 

오클랜드나 호주를 거쳐온 손님들은 한 번도 써보지 않은 것 같은 국제용 신용카드와 빳빳한 유에스(US) 달러를 앞다투며 내밀었다물만 먹어도 배가 부를 황홀한 기분이었다. 그 흐름이 몇 년만 더 이어졌다면 권영진은 아마 갑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지금도 숱한 사람이 치를 떠는 IMF가 터졌다. 1997 11월 말, 어느 날이었다.” 

 


<지난 호에 이어>


딸내미와 보낸 한 달, 인생 최고의 행복

 ‘남자는 무엇으로 웃는가?’

 나는 인터뷰 도중 갑자기 그게 궁금했다. 그가 너무 진지해 분위기 전환 차원에서라도 좀 색다른 얘기를 듣고 싶었다.

 살짝 웃음을 건네며 그에게 물었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나요?”

 일 초의 고민도 없이 답이 나왔다.

  “딸내미와 보낸 한 달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그는 말했다. 어쩌면 더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없을 것처럼 활짝, 웃었다. 그의 웃음에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환갑을 넘긴 남자가 그렇게 해맑게 웃을 수 있다는 게 반가웠다.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자식은 생의 비타민인 것이 분명하다.

 현재 오클랜드 대학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는 딸내미가 초등학교 4학년 때(1993), 뉴질랜드를 한 달간 놀러 온 적이 있다. 여름방학을 맞아 아빠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풍운아의 딸답게 열 살 꼬마 아이가 혼자 남태평양을 건너왔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이 딱 맞았다.

 “모터바이크를 이용해 전쟁기념박물관, 미션 베이, 데본포트 등 오클랜드 곳곳을 돌아다녔어요. 아마 교민 가운데 면허 1호가 아닐까 싶어요. 차 대신 모터바이크를 산 거지요. 딸내미를 뒤에 태우고 여행을 다닌 것이 가장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그때만큼 행복한 시간이 또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자주 하죠.”         


 

34일 둘러보고 퀸스타운 정착 결심

권영진은 1991 12월 오클랜드에 도착해 서너 해를 뉴질랜드 여행업계의 전설인 친구 음기형 사장의 일을 봐주며 시간을 보냈다. 병원 사업에 실패해 잠시 태국에서 쉬고 있던 그를 뉴질랜드로 보내준 친구였다. 음 사장은 IMF 이후 태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지금은 5백여 명의 러시아 직원을 두고 러시아 여행업계의 대부로 활동하고 있다. ‘빗물도 그냥 마신다는 뉴질랜드 천혜의 환경에 매혹된 수많은 한국 사람이 이민러쉬를 이룰 때였다. 한인 관광업계도 꼴 잘 먹는 어린 양처럼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었다.

그는 북섬 관광지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로토루아에 터를 잡고 싶었다. 그러나 관광업을 오래 해온 친구가 심사숙고한 끝에 다른 제안을 했다. ‘퀸스타운에 가서 사업하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전적으로 밀어주겠다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충분히 도와줄 수 있는, 그 누구보다 듬직한 절친(아주 친한 친구)이었다.

얼만 안 있어 권영진은 여왕이 살 만큼 아름답다, 그렇지만 교민사회에서는 다소 낯설었던, 퀸스타운에 내려갔다. 공항에 도착하자 눈이 내리고 있었다. 퀸스타운이 처음이었던 권영진에게는 서설이나 다름없었다. 34일 둘러본 끝에 결정했다. ‘여왕의 삶을 살겠다. 가게 계약서에 이름 석 자를 넣고 멋지게 서명을 했다. 또 한 번의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994, 만으로 마흔 나이에 식솔을 이끌고 퀸스타운에 둥지를 틀었다. 전체 교민은 그의 가족을 포함, 네 가족에 불과했다. 청교도들이 그러했듯 권영진 가족도 프런티어(개척자) 정신으로 살아야만 버텨낼 수 있었다. 그는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층집 한 채를 사서, 한 지붕 세 가족이 함께 살았다. 그의 가족,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장인 장모. 이국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아름다운 동거였다.

 

녹용 판매점, 기념품점 등 업체 4개 열어  

처음 문을 연 가게는 퀸스타운 호수를 눈앞에 두고 있는 녹용 판매점. 많은 관광객은 아니었지만, 남섬에 여행을 오는 모든 관광객은 반드시 들렀다. 크라이스트처치와 더니든 등 뉴질랜드 남섬에서 자란 사슴뿔은 최고의 여행 선물이었다.

녹용으로 어느 정도 돈을 모은 권영진은 곧이어 기념품 가게를 하나 냈다. 뒤이어 흑진주(opal) 가게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녹혈 공장 전문 매장까지 차렸다. 직원이 열두 명에 달했다. 월급으로 나가는 돈만 해도 수만 달러였다. 한인 업체치고는 제법 모양새를 갖춘 기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게 문을 열고 3년을 미풍에 돛달고 항해하듯 순항했다. 오클랜드나 호주를 거쳐온 손님들은 한 번도 써보지 않은 것 같은 국제용 신용카드와 빳빳한 유에스(US) 달러를 앞다투며 내밀었다. 오클랜드와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여행사 손님들이 빼먹지 않고 들렀다. 팀당 수천 달러의 목돈이 권영진 은행 계좌에 차곡차곡 쌓였다. 물만 먹어도 배가 부를 황홀한 기분이었다. 그 흐름이 몇 년만 더 이어졌다면 권영진은 아마 갑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지금도 숱한 사람이 치를 떠는 IMF가 터졌다. 1997 11월 말, 어느 날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났다. 난생처음 당해본 그 난()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단군 이래 최초로 겪은 경제적 대재앙은 1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던 뉴질랜드도 비켜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2주 후, 그가 운영하는 네 곳의 매장에서 손님 한 명을 찾아볼 수 없었다. 칠판에 빼곡히 적혀 있던 여행 팀 명단이 완전히 지워졌다. 화이트보드가 정말로 화이트’(White)로 변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블랙보드, 아니 블랙 마인드로 얼룩졌다. 뉴질랜드에서 사업하면서 겪은 최대의 위기였다.

 

집 팔아도 빚 남아나머진 운명의 손에

변호사를 찾아가 솔직히 얘기했어요.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고요. 변호사가 나를 대신해 건물 주인을 찾아다니며 설득했어요. ‘셔터 아웃.’ 말 그대로 물건을 그대로 둔 채 나오는 조건으로 모든 사업을 접었어요.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요.”

IMF 사태는 권영진은 물론 건물 주인에게도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빚잔치는 아니었지만, 권영진은 최선을 다해 건물 주인과 종업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애를 썼다. 여행사에 선금으로 주다시피한 수수료도 다 날아갔다. 그나 저나 다들 IMF의 피해자였다. 집을 팔아 빚을 다소 정리했다. 그런데도 턱없이 부족했다. 나머지는 운명의 손에 맡겼다.

그렇게 석 달이 흘러 사업은 완전히 정리됐다. 이제 결정할 시간만 남았다. 계속해 퀸스타운에 남아 권토중래를 꿈꾸느냐,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사해 새 일을 모색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섰다.

권영진은 가족들 몰래 리마커블(Remarkable, 2,800m) 산 정상으로 터벅터벅 올라갔다. 그곳에다 텐트를 쳤다. 세 밤을 오로지 성경만 읽으면서 보냈다. 신학을 하면서 한 번도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던 신의 세계를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한 날들이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의 이 고통도 죽을 만큼 큰일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 나약한 인간에게 절대자가 준 선물이었다.    

 며칠 지나 삶의 근거지를 크라이스트처치로 옮겼다. 대학을 눈앞에 둔 자식들(아들과 딸)의 교육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삶의 틀이 잡히자 권영진은 뒤도 안 돌아보고 중국으로 떠났다. 태국에서부터 힘이 되어 준 친구의 조언을 따랐다. 그는 그곳에서 보따리 장사를 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모두 IMF의 상처를 안고 무조건 대륙으로 건너간 사람들이었다.

 

중국에서 8개월간 보따리 장사 하기도

 “심양, 하얼빈, 대련 등을 돌아다녔어요. 동대문시장에서 옷이나 모자를 떼어와서 파는 식이었지요. 백화점 들어가는 입구나 체육관 한 귀퉁이를 임대해 매대에 물건을 대충 올려놓고 손님을 끌었어요. 각설이처럼 소리소리 지르기도 했지요. 근데 그게 보따리 장산데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겠어요? 그냥 밥값, 술값 정도죠. 대신 경험은 많이 했죠. 그게 남은 거라면 남은 거죠.”

 권영진은 이 슬픈 얘기를 웃으며, 너무 담담히 말했다. 아무리 지난 얘기라 해도 듣는 이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그러면서 든 생각.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과 내가 겪은 고생만 가슴 아픈 게 아니다는 것.

 여덟 달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중국에서 그렇게 보냈다. 권영진 나름대로 고른 권토중래의 한 방법이었다. 맷집도 어느 정도 세졌다. 바람과 구름을 넘고 넘어 오클랜드로 돌아왔다. 금의환향도 아니고, 그저 조금은 늙수그레한 사십 대 중반 남자의 초라한 귀향이었다.

 그러나 퀸스타운에서 사업하면서 평소 쌓은 덕이 있었는지 곧 잡 오퍼를 받았다. 그의 불세출 영업기법을 탐내던 한 회사가 그를 스카우트했다. 로토루아에 있던 녹용 가게였다. 그는 그곳에서 권 박사로 통했다. 진짜 박사는 아니었지만, 녹용에 관한 지식만큼은 박사급이라 붙여진 애칭이었다.

 “매출의 5%를 주겠다고 했어요. 파격적인 조건이었죠. 한 달에 15천에서 많게는 3만 달러 이상을 받았어요. 월급쟁이치고는 거액이었죠. 크라이스트처치에 살고 있던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내주고 나머지는 내 용돈으로 썼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많아 돈을 모으지는 못했어요.”

 

도전 혹은 도피’, 50 나이에 새 모험 나서

 권영진은 뉴질랜드에 살면서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로토루아에서 물심양면으로 힘을 실어준 오클랜드한인회 3대 회장 임영철 씨 부부를 마음의 기쁨으로 간직하고 싶다고 했다.

 아침에는 골프를 하고 오후에는 여행 팀을 받고 저녁에는 술 마시던 그 황금 같은 시절은 4년 만에 끝났다. 피치 못한 사정으로 그만두게 됐다. 새천년이 한 해 지난 그때 그의 나이는 50에 가까웠다. 새로운 모험을 하기에는 나이가 좀 들었고, 그렇다고 그냥 맥없이 주저앉기에는 나이가 좀 아까웠다.

 짐을 싸서 퀸스타운으로 내려갔다. 권영진은 거기서 세월을 좀 죽였다. 그러다 큰 결심을 했다. ‘깊은 산 속에 들어가 10년만 조용히 살아 보겠다는…’ 그게 위대한 도전인지 아니면 어설픈 도피인지 알 수 없지만, 그 결심을 계기로 그는 대오각성한 선각자가 됐다. <다음 호에 계속>


_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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