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열전(5-3) 한인 역사의 산 증인 변경숙 씨

손바닥소설


 

뉴질랜드 이민 열전(5-3) 한인 역사의 산 증인 변경숙 씨

일요시사 0 1488

병원·법원·경찰서 어디든 달려가는 한인 해결사’ 

봉사와 섬김의 삶 이어와…2005년 한인 최초로 영국 여왕 훈장 받아

 

뉴질랜드를 가리켜 이 나라’, 더 심하면 이놈의 나라라고 하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돼요. 그런 표현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뉴질랜드의 비단길(사회 복지 제도, 좋은 자연 환경, 세계적인 청렴 국가 등)이 어느 날 갑자기 깔린 게 아니에요. 먼저 사신 분들의 피땀으로 놓인 것이에요.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한인 해결사미스터 알아봐달라’.

 앞은 변경숙의 별명이고, 뒤는 남편 로이 윌슨의 별명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변경숙이 사는 집을 세 번째로 찾아간 날, 그의 집에는 나보다 먼저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칠십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JP(Justice of Peace, 지역 판사 역할) 업무도 보는 경숙에게 서명을 받기 위해서였다. 서류에 서명을 받는 데는 몇 분이면 끝날 텐데 반 시간이 지나도록 할아버지는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구한(?) 신세를 토로했기 때문이었다. 경숙은 불편한 기색 없이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분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듣고서야 자리를 떴다.

 

점수제 이민 도입 후 교민 숫자 대폭 늘어

 1992년 말 오클랜드로 올라온 경숙네 가족은 본격적으로 한인들의 도우미로 활동하게 된다. 다음 해부터 시작된 점수제 이민으로 오클랜드에는 하루가 다르게 교민 숫자가 늘었다. 그 이야기는 크고 작은 문제도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10년 넘게 다진 웰링턴 경험을 바탕으로 경숙은 오클랜드 교민들의 입과 귀가 되어 주었다. 음주 운전, 아이들 학교 입학, 부부 싸움 등 사소한 문제부터 법정에서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까지 모든 일이 그의 도움을 통해 해결됐다.

 “무엇보다 문화 차이로 생긴 일이 많았지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어요. 툭하면 경찰의 전화를 받았어요. 그때마다 내 동족을 살린다는 마음으로 달려갔어요. 누구보다 제가 그 고통을 잘 알아 만사를 제치고 현장으로 간 것이지요. 그렇게 사십 대 오십 대를 보냈습니다. 이제는 좀 쉬엄쉬엄 하고 있습니다. 저 말고도 하실 분들이 많아졌으니까요.”

경숙은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하고 싶은 사건이 하나 있다고 했다.

1990년대 중반, 어느 날 새벽에 경찰 전화를 받았다. 순간 느낌이 안 좋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션 베이에서 시신 하나를 발견했는데 아무래도 한국 사람 같으니 와서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경숙은 졸린 눈을 비벼 뜨고 시신이 안치된 곳으로 갔다. 거기에는 이십 대 중반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아주 잘 생긴 유학생 청년이었어요. 밤늦은 시간에 방파제를 걷다가 미끄러져 익사한 것 같았어요. 한국에 전화를 했지요.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지 어머니 혼자 오클랜드에 오셨어요. 그분과 함께 모든 장례 절차를 밟았어요. 제 남편 로이가 중간에서 모든 일을 봐 주었어요. 청년 어머니는 많이 배운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도 매사에 의연했어요. ‘내가 남 앞에서 울면 안 되지. 예의를 지켜야지그러시더라고요. 정말 가슴이 뭉클했어요. 내 일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고요.”

그 외 숱한 사건과 사고가 있었다. 그 일을 순조롭게 해결하는 데 경숙의 역할이 컸다.

 

늦장 동행 덕분에 다행히 유치장 신세 피해

또 다른 사건.

어느 날 자정이 넘어갈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경숙은 몸이 안 좋아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화벨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직감이 이상해 마지못해 수화기를 들었다. 예상대로 경찰이었다.

경찰서에서 난동(?)을 부리는 한국 사람이 있다는 전화였어요. 제가 너무 몸이 안 좋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면 안 되겠냐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 경찰이 자기가 직접 집으로 와서 모시고 갈 테니까 꼭 같이 가 달라고 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지요. 현장에 갔더니 사십 대 중반의 남자가 있더라고요. 음주 운전이었어요. 한눈에 봐도 한국에서 높은 자리 한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그런 사람이 볼품없는 유치장에 갇혀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저랑 얘기를 나눈 뒤 마음이 안정돼 곧 풀려 날 수 있었어요. 다행히 제가 몸이 안 좋아 동행을 미루는 바람에 그사이 취기가 가셔서 그랬는지 구속될 지경까지는 아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절묘한 순간이었어요.”

경숙은 교민들이 경찰 앞에 섰을 때 꼭 알아야 할 팁을 알려줬다.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로 화를 내지 말 것, 그리고 큰 소리를 지르지 말라고 조언했다. 뉴질랜드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가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시간 허락하는 한 병원 통역은 계속할 것

서른 해가 넘게 교민들의 손과 발이 되어준 경숙도 이젠 육십 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렀다. 서서히 은퇴를 준비할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꼭 하나, 될 수 있으면 끈을 놓지 않고 싶은 게 있다. 바로 병원 통역이다.

제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일 년 넘게 고생하면서 하나님께 맹세한 것이 하나 있어요. 이 병만 낫게 해 준다면,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절대 외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어요.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는지 제 병을 고쳐주셨어요. 저 역시 제가 맹세한 대로 환자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보탬을 주고 있어요.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병원 통역은 어떻게든 시간을 내 해주고 있습니다. 아픈 사람의 처지를 제가 잘 알기 때문이에요. 앞으로도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하려고요.”

경숙의 이민 역사는 봉사의 역사, 섬김의 역사다. 한인 사회에서 그의 흔적이 거쳐 가지 않은 곳은 없다. 한인회는 물론 한국학교, 한인사 발간, 브라운스 베이 시니어 클럽 등 여러 단체에서 활동해 왔다. 돈 한 푼 안 되는 순수한 봉사와 섬김이다. 그는 왜 그렇게 열심일까.

뉴질랜드는 제게 제2의 고국이에요. 때로는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싫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서 그런지 그 누구보다 뉴질랜드를 사랑하고 있어요. 제가 속한 단체는 물론 모든 한인이 그런 마음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작은 힘이지만 봉사의 손길을 보태고 있어요.”

 

뉴질랜드는 이놈의 나라가 아니에요

경숙은 한인들이 조심해 주었으면 하는 당부를 하나 했다.

뉴질랜드를 가리켜 이 나라’, 더 심하면 이놈의 나라라고 하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돼요. 그런 표현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뉴질랜드의 비단길(사회 복지 제도, 좋은 자연 환경, 세계적인 청렴 국가 등)이 어느 날 갑자기 깔린 게 아니에요. 먼저 사신 분들의 피땀으로 놓인 것이에요.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경숙의 남편 로이 윌슨은 검소그 자체다. 그는 결혼 뒤 단 한 벌의 양복도 사지 않았다. 아들 결혼식 때에도 총각 때 입던 옷을 세탁해 입었다. 검소하게 사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다. 그는 총각 시절, 수입의 65%를 세금으로 냈다고 한다. 그 당시 직장인들도 다들 그렇게 냈다. 정부는 그 돈을 모아 도로를 깔고, 병원을 짓고, 복지 혜택을 늘렸다. 뉴질랜드를 오늘의 복지국가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수술을 받기 위해 일 년 이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몰랐다. 길거리에 차가 넘쳐 시도 때도 없이 길이 막힐지도 몰랐다. 결코 한국 사람을 비롯해 아시안 이민자들의 탓을 하자는 게 아니다. 적어도 그들의 삶을, 그들의 희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아는 주자는 뜻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들의 반()아시아 감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경숙은 단호히 말한다.

나이 드신 게 벼슬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이가 드셨으면 그 나이에 걸맞게 가정과 사회에 본이 돼야죠. 무조건 받으려고 할 뿐 아무 도움이 안 된다면 그건 아니라고 봐요. 그렇다고 대단한 도움을 주라는 뜻은 아니에요. 길가에 버려진 휴지를 줍거나, 자선 모금함에 골드 코인($2, $1짜리) 한두 개를 집어넣거나 하면 돼요. 작은 일이지만 그게 바로 뉴질랜드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실천 정신이라고 믿어요.”

 

세금 제대로 내야 더 아름다운 나라 될 것

경숙은 입술에 힘을 주어 또 강조했다.

일전에 교회 다니는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십일조를 냈더니 세금 낼 돈이 없다고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저도 기독교 신자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세금을 떼먹을 수 있나요? 그러면서 복지 혜택을 받길 원한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지요. 기독교인은 물론 모든 교민이 정부에 제대로 세금을 낼 때 뉴질랜드가 더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이라고 자신해요.”

반평생 넘은 세월을 뉴질랜드에서 산 경숙의 일침’(一針)은 끝없이 이어졌다. 나름대로 법을 지키며 착하게 산다고 자부하던 나도 그 침(, 바늘)에 더러 찔렸다. 경숙이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삶이 하늘을 우러러 큰 부끄러움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본다.

2005 4 12일 변경숙은 뉴질랜드 정부로부터 영국 여왕 훈장(Queen Service Medal, QSM)을 받았다. 스무 해 넘게 한-뉴 간의 민간 외교관으로 활동한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때까지 한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수상식날 인사말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앞으로도 뉴질랜드와 교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그 다짐은 지금도 진행형이다.<다음 호에 계속>

_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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