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93) - 시드니 단상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93) - 시드니 단상

정원교회 0 6725

5박 6일 동안 시드니에 다녀 왔다. 둘째 딸의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되어 4년 7개월 만에, 딸 덕분에 처음 가져보는 휴가였다. 게다가 미국에 나가 있던 큰 딸도 시드니에서 합류하게 되어 있던 터라 마음이 더 설레었다.

댄스를 전공한 큰 딸은 열정적이고, 자유분방한 스타일이다. 나름대로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이번에 뉴질랜드로 완전히 들어오기로 했다. 함께 일하자는 비욘세의 제의도 뿌리치고 돌아오기로 한 큰 딸이 대견하다. 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성적으로 문란한 나라,,, 가진 자에게는 천국이요, 가난한 자에게는 지옥인 나라,,, 복지와는 거리가 먼 나라,,, 첫째가 경험한 미국의 모습이었다. 결국 자신은 뉴질랜드가 맞는다며 5년 만에 돌아왔다. 미국에서 쌓은 오 년 간의 커리어를 바탕으로, 뉴질랜드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겠단다.

한국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나가 있던 3년 9개월 동안은 다섯 식구가 뉴질랜드, 호주, 미국, 한국 등 네 나라에 흩어져 살았다. 가히 국제가족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둘 째 결혼식에 맞춰 다섯 식구가 실로 육 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둘째가 시드니로 간 것은 십이 년 전이었다. 둘째는 오클랜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드니에 있는 NSW 의대에 입학하였다. 의사가 되기 싫다는 아이를 강제로 의대에 보냈다. 부모 입장에서 보기에는 의사가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사회적으로도 대우받는 직업이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나도 의사였기에, 비교적 젊은 나이에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십이 년 전, 둘째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자기 엄마를 닮아 머리가 비상한 둘째는 시니어 컬리지를 2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정상적으로는 아직 고등학생이어야 할 나이에, 가족 품을 떠나 홀로 서기를 시작해야 했다. 홀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으면, 처음 이 년 동안은 다시 오클랜드로 돌아오겠다고 많이도 졸라댔었다. 십이 년 전, 부모 곁을 떠나기 싫어, 울고불고 떼쓰는 아이를 반강제로 시드니에 놓고 왔었다.

세월이 흘러 아이는 어른이 되었고, 아비는 이제야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시드니에 갔던 것이다. 방학 때 집에 들러서 몇 번 만나기는 했지만, 시드니를 찾아가 만난 적은 없었다. 대학 졸업식 때도 나는 한국에 공부하러 가 있었고, 아내만 참석했었다.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인 둘째였다. 내게는 공주와도 같았고, 항상 어린아이였지만, 이제는 의젓한 닥터가 되어 있었다. 일주일에 20여 시간 일하고 주급 5000불을 받는, 꽤 인정받는 의사가 되어 있었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오는 가족을 위해 그럴듯한 아파트도 엿새 동안 빌려 놓았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호사스런 식사 대접도 받았다. 결혼식 비용도 자기들이 부담하고, 결혼예물도 자기들이 알아서 주고 받았다. 살 집도 모기지 얻어 장만해 놓았다. 부모가 한 일이라곤 학비 대주고, 결혼할 때 몇 만불 도와준 게 전부다.

육 년 만에 온 가족이 기쁨으로 한 데 모였다. 시드니에서 한 자리에 모였다. 고급 승용차에, 고급 레스토랑에,,, 시드니의 야경만큼이나 아름답고, 즐겁고, 기쁜 만남이었다. 오랜만에 가 본 시드니는 많이 변해 있었다. 하버브릿지와 오페라 하우스를 중심으로 한 광장은 그 중에서도 압권이라 할 만하다. 오클랜드의 야경도 둘 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시드니의 야경 앞에서는 한 수 아래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시드니 야경도 신부 앞에서는 부끄러워 수줍어할 것 같았다. 결혼식은 바닷가 야외에서 있었다. 신부와 팔짱을 끼고 레드 카펫 위를 걸었다. 딸 앞에 부끄러웠던 아비의 마음에 아픔이 비수처럼 찔러왔다. 참으로 딸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부끄러운 아비였는데, 딸은 너무나도 훌륭하게 커 있었다. 신부를 신랑에게 넘겨주고 나자, 만감이 교차해 왔다.,,, 부디 행복하게 잘 살거라, 나의 딸아,,, 딸의 행복을 비는 아비의 마음은 남 몰래 흘리는 눈물로 아릿하게 젖어왔다.

시드니에서 돌아오고 나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 갑자기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런데 이게 생리적 현상일까? 아니면,,, 심리적 현상일까? 혹시 자폐아처럼 내 마음의 귀가 닫힌 것은 아닐까,,,

시드니에 머무는 동안 마음 한 편이 계속 무거웠었다. 가족들과의 대화 속에서 느껴지는 어떤 거리감이라고 할까, 소외감이라고 할까,,, 이방인이 된 느낌이 수시로 들곤 했었다. 돌이켜 보면 각자 자신의 길을 열심히 뛰어온 세월이었다. 각자 나름대로의 성과가 있어서, 세상적으로는 부러울 게 없는, 소위 잘 나가는 집안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문제였다.

자식 잘 되는 데 기뻐하지 않을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마는,,, 나는 목회자가 되어 있었다. 불신의 가정에서 나는 홀로 목회자가 되어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를 수 밖에 없는, 나홀로 목회자가 되어 있었다.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지 못한 아비로서,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오며, 무겁게 눌리고 있었다. 딸의 결혼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이유다. 언젠가는 우리 가족이 주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그날을 기다린다.

불신의 땅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시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내셨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세상에서의 천 날보다 낫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음을,,, 나의 딸, 나의 가족이 알게 될 그날을 기다린다. 못난 아비는 오늘도 딸과 가족을 위해 기도의 손을 모은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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