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2장 4-7절)

기독교


 

<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2장 4-7절)

일요시사 0 1203

아가 2장 4-7절은 솔로몬 왕을 지나치게 사랑하다 병이 난 술람미 여인이 왕의 품에 안겨서 평안을 누리는 내용이다. 

 

치환하면,, 병이 날 정도로 주님을 지나치게 사랑하다 주님의 품 안에서 지극히 깊은 평안을 누리는 성도의 모습이다. 

 

술람미 여인은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다”고 고백한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므로 병이 났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병이 날 정도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도 마땅히 이런 고백이 나와야 하지만, 우리의 입에서는 이러한 고백이 쉽게 나오질 않는다. 아니, 나올 수가 없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만,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젖먹이 때, 아기들이 어머니의 끔직한 사랑과 돌봄을 받는다. 똥 싸면 다 치워주고, 씻어주고, 깨끗한 옷으로 가라 입혀준다. 젖먹이에게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 아기들은 아직 어머니의 고마움을 잘 알지 못 한다. 고마움을 알기는커녕 배고프면 젖 달라고 울 줄만 안다. 그렇다고 아기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젖을 물고 있노라면 편안해지고 푸근함이 느껴진다. 젖먹이도 어머니의 사랑을 느낀다. 젖먹이에게 어머니는 배고프다고 울면 젖 주는 사람, 똥싸면 치워주고 씻어주는 사람, 울면 안아주고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필요할 때면 어머니를 찾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젖먹이가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 마디로 아기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줄은 알아도, 아직 어머니를 사랑할 줄은 모르는 것이다.

 

아기들이 어머니가 자기를 낳기 위해서 얼마나 큰 산통을 겪었는지 모르는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겪으신 출산의 고통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독생자를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는 아버지의 아픔을 모른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저주하신 아버지의 고통을 잘 모른다. 그 저주는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였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들은 십자가에서 주님 위에 쏟아진 하나님의 저주를 모른다.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을 모른다. 그 아픔의 심연과 우주적 무게를 모른다. 어렴풋이 알기는 하겠지만, 그 고통과 사랑과 은혜의 무게와 깊이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어머니의 출산의 고통을 통해서 자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라는 출산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나의 모든 죄악을 뒤집어쓰시고, 내가 받아야 할 영원한 저주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저주 받으시고, 버림 당하시며 부르짖는 고통의 절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자들이다. 

 

그런데 아직 믿음이 어릴 때는 이런 십자가의 은혜가 가슴에 찔리는 아픔으로 박혀 있지 못하다. 그래서 어린 성도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젖먹이가 어머니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내가 배 고플 때 울면 젖을 주시는 어머니와 같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기도는 이 문제 해결해주세요, 저 문제 해결해주세요 하는 수준에 머물게 된다. 그것도 평소에는 자기 멋대로 살다가, 어려울 때만 주여, 주여 하면서 기도한다. 아기가 잘 놀다가 배가 고프거나, 똥을 쌌거나, 어디가 아프거나, 무슨 문제가 생길 때면 우는 것처럼 말이다. 

 

젖먹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젖을 때고 이유식을 먹고, 더 자라면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적 음식을 먹고 자란다. 그 중 가장 단단한 음식이 ‘사랑’이라는 음식이다. 사랑,, 얼마나 단단한 음식인가? 마 5:44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렇게 단단한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엄청난 믿음의 사람이다. 말씀을 소화시킨다는 말은 그 말씀의 참 뜻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알고, 말씀대로 살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지상적 존재로서 신앙인들의 한계일 지도 모른다. 특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마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독교인이 어디에 있나?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기독교인이 어디에 있나? 

 

요 15:12 “내 계명은 이것이니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을 주셨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신 십자가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가 사랑에 있다고 말한다. 요일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사랑이라는 삶의 모습으로 구원의 증거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16절에 가면 더 무시무시한 말씀이 나온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요일 4:20에서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를 알게 되면, 남는 것은 ‘절망’이라는 단어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이다. 아니, 사랑을 하긴 하지만, 주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을 결코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실체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기에,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입에서 나오게 된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는 바울의 고백으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한다. 그래서 그 사랑은 아픈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한다는 고백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마음 아픈 사랑의 고백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로 인해서 아파하며 마음에 병이 난다. 그 마음의 병은 술람미 여인처럼 왕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난 병이 아니라,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병이다. 

 

 

 

채원병 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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