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08) 여수룬이여!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08) 여수룬이여! <창세기 25:27~34>

 “여수룬”이라는 말은 “온전하고 의로운 자” 또는 “정직한 자” “바른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여수룬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사랑스러운 애칭으로 부를 때 사용되어지는 시적인 단어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여수룬”이라는 단어가 총 네 번에 걸쳐서 나오는데, 신명기에서 3번, 이사야에서 1번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과 에서가 등장합니다. 야곱은 후에 그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어집니다. 이사야44장 1절에서 2절 말씀에 보면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이라고 불리워집니다. 반면에 에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잃어버리고,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신명기 32장 10절에서 15절의 말씀처럼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주신 복을 발로 차버리고, 야곱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야곱은 둘째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갈 믿음의 장자로 쓰임 받아, 여수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집니다. 에서는 첫째이면서도, 에돔족속의 조상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본문에 나오고 있듯이 팥죽 한 그릇 때문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여, 결국에는 그 축복을 자신의 삶에 누리게 되고, 에서는 이미 받은 축복을 귀히 여기지 않았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손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에서입니다. 에서는 본래 장자로 태어나 여수룬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었지만, 그 이름을 야곱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과는 거리가 먼 삶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 시발점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왜 에서는 자신이 받은 모든 축복을 잃어버린 자가 되고 마는 것인가요? 세 가지가 부재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가 없었기 때문이예요. 함께 말씀을 통해 에서에게 없었던 세 가지를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점검하는 시간으로 삼으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귀중함의 부재입니다. 


본문을 보면 형 에서가 밖에 나가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고 났더니 너무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인데, 집에 들어왔더니 맛있는 냄새가 납니다. 무슨 냄새인가요? 야곱이 팥죽을 끓이고 있습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말합니다. 30절입니다.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그랬더니, 대뜸 야곱이 말합니다. 31절에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이 한 마디에 엄청난 것이 담겨 있습니다. 형이 가지고 있는 것, 그 중에서 다른 것 말고 장자의 명분을, 다른 날 말고, 오늘 지금 당장 내게 팔라. 댓가는 죽 한 그릇이다. 에서는 곧바로 32절에 대답하죠. “내가 지금 배가 고파 죽게 생겼는데, 그 장자의 명분이라는 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냐?” 그러자 이번에는 야곱이 좀 더 확실하게 요구합니다. 33절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인감도장 찍으라는 거예요. 에서는 맹세함으로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립니다. 

  

이렇게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그릇을 주고 샀습니다. 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에서가 지금 팥죽 한 그릇에 맹세를 하면서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았지만, 그가 정말 “내가 장자의 명분을 동생에게 팔았다.”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에서는 생각했겠죠. “여기서 맹세하고 말한다고 해서 어떻게 장자의 명분이 동생에게 가나?” 아무 생각없이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왜요? 장자의 명분에 대한 귀중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겼다면, 야곱이 이런 제안을 할 때에, 정색을 하면서 화를 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볼 때에, 에서의 평소의 행실이나 마음을 대략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27장에 가면, 드디어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고자 하는데, 동생인 야곱이 대신 들어가서 축복기도를 받습니다. 이삭은 눈이 어두워 알아보지 못하고 야곱에게 축복을 빌어줍니다. 그런데 거기 보면 이삭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이건 발각된 거잖아요. 그럼에도 이삭이 그냥 야곱을 향해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죠. 이후에 에서가 뒤늦게 들어와서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을 구합니다. 그제서야 이삭이 깨닫게 되고, 에서는 소리를 높여 울면서 “아버지! 나도 축복 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전까지는 귀중함을 모르고 있다가, 다 빼앗기고 나서야 통곡하는 거예요. 그러자 이삭이 에서를 향해 축복합니다.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이 때로부터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게 되고, 에서는 자기의 칼을 믿고 살아가는 삶이 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가진 것의 소중함을 잘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먼저는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의 귀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에서처럼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울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 귀중함을 잠깐 소홀히 했다가 그 삶 전체가, 그 후손들의 삶 전체가 달라지잖아요. 내게 주신 은혜 귀하게 여김으로, 더 귀한 것을 채워주시는 주의 은혜를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간절함의 부재입니다. 


야곱하면 딱 떠오르는 단어가 있죠. “간절함, 사모함” 본문 바로 앞에 있는 창세기 25장 22절에서 26절까지 보면, 야곱과 에서가 어머니인 리브가의 태중에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리브가가 아이를 임신했는데, 쌍둥이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둘이 싸우는 거예요. 나중에 태어날 때 보니까, 야곱이 에서의 발 뒤꿈치를 잡고 나옵니다. 이것은 야곱의 간절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습니다. 더 귀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향한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어떤가요?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귀중함을 모르니까, 간절함도 잃어버린 채 삶아갑니다. 그가 사냥감을 노릴 때처럼 간절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다면 그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에서의 가장 큰 약점은 간절함의 부재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일반적으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다 넉넉하고, 안정되어 있고, 그러면 간절함이라는 게 생겨나지를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고, 애들도 속도 안 썩이고, 건강도 괜찮고, 한 마디로 살만 하면 간절함이라는 것이 점점 사라져버립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간절함이 없었습니다.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간절하게 사모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하지만 야곱은 어떻습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의 복을 사모합니다. 간절함으로 하나님의 복을 구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세상적으로는 얍삽하게 보였지만, 속이는 모습처럼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는 야곱은 끝까지 간절함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장자의 권한을 팥죽 한 그릇으로 사내고,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까지 받아내고야 맙니다. 그 이후 20년의 타향살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얍복강에 주저앉은 야곱.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합니다. 씨름 중에 환도뼈, 즉 고관절이 부러지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야곱은 “나에게 축복하지 않으면 놓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축복을 사모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천사가 새로운 이름을 주죠. “이스라엘”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하지만 이런 뜻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이겼다. 하나님만 붙잡는다.” 이런 뜻도 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고 붙잡았던 야곱의 간절함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죠.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삶 속에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이 간절함의 부재입니다. 처음에 신앙생활 시작할 때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은혜를 향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말씀도 배우고, 기도의 자리도 사모하고, 제자훈련도 하고, 이런 저런 봉사도 하면서 신앙이 막 성장합니다. 아주 재미있죠.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가면서, 어느 순간부터 말씀에 대한 사모함, 기도에 대한 간절함이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합니다. 신앙의 연수도 좀 길어지고, 말씀도 좀 어느 정도 알고, 기도도 좀 할 줄 안다고 여기면서 점점 간절함과는 거리가 먼, 신앙의 안정기, 좀 더 자극적으로 말씀드리면 “권태기”가 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믿음의 견고함을 이루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정작 내 신앙의 기초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믿음의 삶에 간절함이 사라지면 안됩니다. 목사들이 성도님들 향해서 “아멘하십시오. 열심히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부르짖어 간구해야 합니다. 봉사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계속 권면하는 이유가 뭔가요? 간절함을 잃어버리면, 내 신앙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간절함의 끈을 붙잡고 더 믿음으로 굳건히 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감사함의 부재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무엇일까요? 감사입니다. 우리 삶에 가장 작은 것이 감사입니다. 가장 흔한 것이 감사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 뭔가 대단한 노력이 들어갈 것도 없고, 뭔가 대단하게 요구될 것도 없는 아주 작고 흔한 것이 감사입니다. 그런데 그 감사가 사라지기 시작하면 삶의 의미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에서의 삶에는 감사가 부재중입니다. 감사가 없어요. 당시 장자는 아버지의 재산 중에 두 몫을 받게 됩니다. 또한 장자는 가정에서 영적 가장의 역할을 이어갑니다. 장자는 가문에 있는 축복권을 이어받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에서의 것입니다. 게다가 에서는 남자답습니다. 건장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습니다. 다 가진 거예요. 하지만 야곱은 차남입니다. 장자와 차남의 차이는 첫째와 둘째의 차이 정도가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우리 나라 옛날 조선시대와 비슷한 가부장적인 사회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버지가 안계시면, 장자가, 큰 형님이 아버지의 권위를 대신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내세울 게 없는 거예요. 서열로 해도 형에게 안됩니다. 힘으로 해도 형에게 안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형을 좀 이겨먹어 보겠다고 날 때부터 형 발뒤꿈치를 잡고, 팥죽 끓여서 형 속여 보려고 하고, 아버지까지 속여서 기어코 장자의 축복까지 받아내고 맙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습니까? 축복은 받았는데, 야반도주합니다. 난데없이 종살이를 하며, 20년의 타향살이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들이 야곱에게는 훈련의 시간이 되었죠. 한 가문을 이끌어갈 장자로서, 이스라엘 한 민족을 이끌어 갈 지도자로서의 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불려질 때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 다음에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려집니다. 장자의 축복이 이렇게 귀한 것이 이겁니다. 원래는 “에서의 하나님”이 되어야 했습니다. 원래는 우리가 이삭의 아들을 부를 때, “에서와 야곱” 이렇게 불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어떻게 부릅니까?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야곱의 하나님!”이라 기록되고, “야곱과 에서” 이렇게 불려집니다. 이 모든 원인은 에서에게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것에 대한 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에서에게 감사가 부재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앞서 이미 나눈 말씀이죠.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감사가 있었다면, 그것을 귀중하게 여겼겠죠.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감사가 있었다면, 그 안에 담긴 은혜를 사모하며 간절함으로 붙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서는 자신의 장자권을 잠깐의 배고픔을 참지 못해 팔아버립니다. 이 모습을 히브리서 13장 16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 감사가 없으니까, 귀중함을 모르고, 망령된 자가 되고 마는 거예요. 

  

감사의 부재는 모든 것의 부재와 같습니다. 지금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귀한 것을 다 누리고 있을지라도, 감사가 없으면,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도 금방입니다. 내 삶에 있어서 감사의 고백이 마르기 시작하면, 정말 큰 위기입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아무리 누가 뭐래도 내 남편, 내 아내가 최고입니다. 아무리 뭐라 해도 내 자녀가 최고입니다. 우리 뉴질랜드광림교회가 최고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최고입니다. 주신 은혜에 감사할 때, 더 큰 감사가 우리 삶에 넘쳐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날마다 감사가 넘쳐나는 삶을 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 전화는 “부재중” 뜨면 다시 전화하면 됩니다. 사무실에, 집에, 사람이 “부재중” 되어 있으면 나중에 다시 찾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신앙의 삶 속에 귀중함이, 간절함이, 감사함이 부재중이면, 내 신앙의 길에 경고등이 켜진 것으로 깨달으셔야 합니다. 주의 은혜를 귀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간절함으로 더 큰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늘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수룬이여!” 하나님 앞에 이 아름답고 귀한 이름으로 불려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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