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19) 성령의 충만함으로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19) 성령의 충만함으로 <사도행전 6:7~15>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령의 충만함으로”입니다. 예전에는 한국교회에서 성령충만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나 “심령대부흥성회”라는 이름으로 일주일씩 부흥집회가 열리면서,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 뜨겁게 찬송하며, 눈물로 기도하며, 두 시간 세 시간씩 설교 말씀을 듣곤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 이미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뜨거운 눈물과 영적 체험으로, 어떤 이들은 그저 따스한 마음의 감동 정도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내가 정말 진심으로 예수 십자가를 향한 믿음을 고백하면 성령께서 내 안에 임하십니다. 하지만 충만은 조금 다르죠. 충만이라는 것은 단어 그대로 보면 차고 넘쳐 흐르는 상태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성령의 임재와 충만 그 사이를 오고가기 마련입니다. 말씀의 자리에서, 기도와 찬양 중에, 교회에서 봉사를 하더라도, 내 안에 충만할 때가 있고, 뭔가 허전할 때가 있습니다. 그게 임재와 충만의 차이입니다. 

  

물론 언제나, 매일, 24시간 충만할 수는 없습니다. 충만을 위해서는 계속 공급되어야 하거든요. 이를 위해서 우리가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며 영적인 은혜를 채워갑니다. 말씀과 기도로 내 안에 은혜를 채워갑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채워가는 겁니다. 오늘도 충만함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서, 늘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떤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더불어 정말 내가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가고 있는 증거는 무엇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말씀 중심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여러분 잘 아시는 스데반집사입니다. 우리가 보통 집사라고 하지만, 지금 교회에서 말하는 집사와는 다릅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영적 지도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점점 부흥되다보니, 사도들을 도와서 구제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곱 명의 집사를 세웠는데, 5절에 나와 있는대로,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니골라.”입니다. 저들은 지금으로 하면 교회의 목회자와 같은 위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특별히 스데반 같은 경우는 복음사역에 있어서 정말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스데반은 그 이름 자체가 “면류관”이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첫 번째 순교를 당함으로 그 이름 그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럼 스데반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기까지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스데반의 첫 번째 직무는 구제에 있었습니다. 앞서 6장 초반부에 나오는 것처럼 일곱 명의 집사가 선출된 이유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비해 헬라파 유대인들이 구제에서 자꾸 소외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교회 내 구제활동을 도맡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 내에서 어려운 사람 찾아서 공평하게 도와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나가서 복음도 전합니다. 교회 안에서 구제만 해도 되는데, 8절 말씀처럼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합니다.” 성령의 은사로 병을 고치는 등의 기적의 역사를 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위험한 일이죠. 초대교회에서 교회가 막 성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스데반이 담대하게 나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령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가득합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와 있는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그가 얼마나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에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이를 갈며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게 되죠. 이들이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가 진실이라는 겁니다. 스데반은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하였기에,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무엇이 가득차 있습니까? 언제나 말씀 중심의 삶을 통해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거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 속한 삶입니다. 


오늘 스데반은 공회에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왜 심문을 받고 있는가? 사람들을 매수해서 스데반에 대해 거짓증언을 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13절에 보면 “스데반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계속 했다.”고 합니다. 거룩한 곳은 성전을 뜻합니다. 그러면서 14절에 좀 더 명확하게 말하죠. “그의 말에 – 스데반이 말하기를 –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이걸 잘 보셔야 합니다. 스데반을 향해서 죄를 물었는데, 그 고발의 근거가 예수님이 당한 죄목과 똑같습니다. 크게 두 가지 죄목입니다.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거스렸다.” 

  

자 이 안에 담겨진 게 어떤 의미인가요? 공회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저 스데반이나 예수라는 자나 똑같은 패거리다.”라는 것이고, 스데반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 입장에서는 “스데반이 예수님께 속한 자다.”라고 확실하게 증명된 것입니다. 오늘 스데반이 심문을 받는데, 죄목이 예수님과 똑같습니다. “저 스데반이라는 자가 자신이 전하는 예수와 똑같은 말로 성전을 모독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하고 있지만, 실제 저들의 속마음은 “우리의 기득권에 흠을 내는 자, 우리의 권세와 이익을 빼앗으려는 자를 가만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전만 붙잡고 있는, 껍데기만 남은 유대교의 종교개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스데반도, 또한 사도들도 이 일에 함께 동참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유대인들 입장에서 볼 때는 성전을 허무는, 자신들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행위였던 거죠. 그 결과가 본문 7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도행전 7장 51절에서 53절을 보면, 오늘 공회에서 스데반은 그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이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선언합니다. 자신을 위한 변호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스데반은 오히려 예수님을 전합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스데반이나, 이방인의 선교사로 부름받아 복음을 전했던 바울이나, 다른 모든 사도들, 복음 전파자, 순교자들의 모습을 통해 깨닫게 되는 공통적인 것이 무엇인가요? “저들은 예수님께 속한 자였다.” 이 사실 하나입니다.우리가 믿는 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내세워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보여야 할 모습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을 통해서 나타날까요? “저들은 예수님께 속한 자다.” “나는 예수님께 속한 자다.” 이거 하나면 충분합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예수님께 속한 자로서의 삶을 증거하는, 가장 귀한 영광의 면류관을 쓰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영적인 평화를 누리는 삶입니다. 


본문 마지막인 15절입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자, 스데반이 지금 공회에 왜 앉아 있나요? 스데반은 예수님을 전하다가 고발을 당하여서 피고인석에 앉아 있습니다. 지금 재판을 해서 잘잘못을 가리고자 하는 과정이지만, 사실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는 공판입니다. 그런데 지금 스데반의 얼굴이 어떻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지금 스데반의 얼굴을 보면서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공회 중에 앉은 사람, 지금 스데반을 고발하고 재판하는 사람들의 눈에 스데반의 모습이 천사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심문하는 사람들의 눈에 스데반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당연히 미워보이겠죠. 그런데 저들이 보기에도 스데반이 천사 같아 보였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 할 수 있었을까요? 보십시오. 스데반이 한 일은 열심히 구제의 사역을 감당한 것입니다. 열심히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거리에 나가서 복음을 전한 것도, 공회에서 자신을 심문하는 자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한 것도, 저들로 하여금 듣고 깨닫고 돌이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스데반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를 고발하는 자들, 자신을 지금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살 길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이 무엇인가요? 스데반이 가진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그게 겉으로 드러나는데 보니까, “천사의 얼굴” 같아 보이는 거예요. 모함을 당하고, 거짓말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함에도,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하는 게 아니라, 평안함이 그려집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영적인 평안함을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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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21-09-17 15:49:09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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