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28)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28)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에베소서 3:14~21>…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죠. “보는 것을 보는 눈이 복이 있도다.” 똑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깨닫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나아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부정적으로 나아가는 자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관점의 차이이고, 이에 따라 삶의 모든 과정과 결과가 달라집니다. 이러한 것을 가르켜 “프레임”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프레임”은 본래 액자나 틀을 뜻하는 단어죠.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속에 자신만의 프레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걸 “마음의 창”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똑같은 사람, 똑같은 상황,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이렇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렇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게 관점의 차이요, 프레임의 차이입니다. 오늘 제목인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내가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본문의 말씀도 지난 주와 같이 바울의 기도입니다. 14절과 15절에 이렇게 시작하죠.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기도문 안에 담겨진 내용을 보면, “성령의 능력, 믿음, 그리스도의 사랑, 충만한 은혜, 하나님의 영광”등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관점을 새롭게 세워가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의 창, 내가 가지고 있는 프레임,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바른 그리스도인의 관점을 갖는 것일까?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영적인 삶은 믿음의 관점으로입니다. 


신앙인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17절에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이게 앞서 16절에 나온 “속사람의 강건함”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특별히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겁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윗과 사울이 골리앗 앞에 섭니다. 하지만 다윗과 사울은 골리앗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습니다. 사울은 패배의 프레임을 가지고 골리앗을 바라봅니다. 인간적인 전략과 전술의 관점으로 골리앗을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골리앗의 체격과 무기만 보이는 거예요. 이길 수가 없죠.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던 승리의 기억이라는 프레임으로 골리앗을 바라봅니다. 믿음의 관점으로 골리앗을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골리앗의 미간, 딱 한방에 쓰러뜨릴 약점이 보이는 거예요. 

  

믿음의 관점은 히브리서 11장에 너무나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서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은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내가 원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아도, 이미 얻은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또한 “믿음은 지금 당장 나를 막아서는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지 않고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것도 믿음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전하는 저를 향해서도, 또한 말씀 앞에 자리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을 향해서도 권면합니다.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께 집중하십시오.” “세상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십시오.” “불신이나 패배가 아닌, 오직 믿음의 시선으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영적인 삶은 믿음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그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 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굳건한 믿음의 프레임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영적 승리의 삶을 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관계적인 삶은 사랑의 관점으로입니다. 


세상살이 속에서 가장 아름답기도 하고, 가장 설레기도 하지만, 또 한편 가장 어렵기도 하고, 가장 상처받기도 쉬운 것이 관계입니다. 그런데 보면 이러한 갈등이나 관계성의 어려움들도 결국은 다 “프레임”의 문제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틀에 맞춰서 저 사람을 바라보다보니, 그 안에 갈등이 생겨납니다. “인간이 어떻게 저래?” “부모가 어떻게 저래?” “학생이 어떻게 저래?” “교인이 어떻게 저래?” “교회가 어떻게 저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굳어진 나의 프레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프레임 안에 안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부터 삐걱거리고 갈등이 생겨나는 거죠. 

  

따라서 모든 관계에 있어서 사랑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저는 많은 사랑의 정의 중에 최고는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물과 같다.” 물은 어떤가요? 물은 네모난 통에 담기면 네모가 됩니다. 동그란 통에 담기면 동그라미가 됩니다. 별 모양의 통에 담기면 별 모양이 됩니다. 물은 내 모습, 내 형태를 고집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내 프레임, 내가 가지고 있는 틀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사랑의 관점입니다. 

  

본문 17절 후반부에 말씀합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믿음은 견고하게 세워져서 흔들림이 없어야 하지만,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물과 같이 사랑의 관점으로, 내 견고한 프레임을 바꾸는 겁니다. 그래서 18절에 이어서 말씀하죠.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우리가 가진 프레임으로는 용납할 수도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씀합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습니까? 19절입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무엇인가요? 하나의 틀이잖아요. 프레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의 프레임이 얼만한가? 한계가 없습니다.

 

 물론 완벽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의지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어떻게든 사랑해보겠다는, 용서해보겠다는, 이해해보겠다는 마음의 부담은 늘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 사랑의 관점으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고 대할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일상의 모든 삶은 은혜의 관점으로입니다. 


한국의 초등학교 2학년짜리 여자 아이가 쓴 [공짜]라는 시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공짜는 정말 많다. 공기 마시는 것 공짜, 말 하는 것 공짜, 꽃 향기 맡아보는 것 공짜, 하늘 보는 것 공짜, 나이 드는 것 공짜, 바람소리 듣는 것 공짜, 미소 짓는 것 공짜, 꿈도 공짜, 개미 보는 것 공짜.” 선생님은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하셨는데, 이 아이는 아홉 가지의 공짜를 이야기합니다. 은혜의 프레임으로 보는 거예요. 우리 일상의 모든 삶 속에 정말 중요한 것, 정말 귀한 것, 정말 필요한 모든 것은 다 공짜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20절에 말씀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은혜” 그것도 그냥 은혜가 아니라,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이미 몇 번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여기까지만 이루어져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여기에다가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일상의 모든 삶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은혜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아니, 은혜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비교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인데, 그저 감사할 뿐인거예요. 

  

“은혜”라는 제목의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의 가사에 담긴 고백이 은혜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찬양을 만든 손경민 음악목사는 은혜라는 찬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은혜를 사모합니다. 어떤 특별한 은혜를 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찬양의 가사 가운데 보면, 이미 누리고 있는 은혜에 대한 깨달음과 감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의 모든 삶은 은혜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행복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내게 베푸신 주의 은혜에 늘 감사함으로, 더 큰 은혜를 받아 누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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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21-09-17 15:53:25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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