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5

문학의 향기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5

일요시사 0 403

<1884년 8월 28일~1950년 12월 12일>



“뉴질랜드 정치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물이었다” 


피터 프레이저는 국가 지도자로서 난세에 제 몫을 다했다. 

국민이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용감하게 대처해 나갔으며, 

국제관계에서 꿀리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뉴질랜드가 결코 만만히 볼 나라가 아니라는 걸 만방에 알린 지도자였다.




진정한 영웅은 난세에 태어나는 걸까? 수천 년 인류 역사는 끊임없는 시련을 견뎌내면서 이어져 왔다. 수많은 담금질 뒤 순금으로 변하듯 역사는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젊었을 때 사회주의자 책 즐겨 읽어


 와이탕이 조약(1840년 2월 6일)이 맺어진 뒤 200년 가까운 뉴질랜드 역사에서 숱한 정치 지도자가 명멸했지만, 그 가운데 국민에게 가장 밝은 빛을 비춘 정치인이라면 단연 피터 프레이저다. 정치 역정이 다른 정치인보다 훨씬 뛰어나서가 아니다. 뉴질랜드가 한창 어려울 때 영웅 역할을 하며 나라를 구해냈기 때문이었다.


 피터 프레이저는 1884년 8월 28일 스코틀랜드 펀(Fearn)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에 빠져 살던 그가 즐겨 읽었던 책은 키어 하디(Keir Hardie, 스코틀랜드 출신), 로버트 블래치퍼드(Robert Blatchford, 영국 출신) 같은 사회주의자들 작품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시력이 별로 좋지 않았던 피터 프레이저는 두꺼운 안경을 걸치고 사회주의자들의 좋은 글을 독파해 나갔다. 그 탓인지 죽기 전에는 거의 눈을 잃을 뻔했다.

 

1911년 피터 프레이저는 뉴질랜드행 배에 몸을 실었다. 기회의 땅, 신 개척지인 뉴질랜드가 부르는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오클랜드에 첫발을 내디딘 피터 프레이저는 곧바로 항만노동자로 뛰어들었다.

 

피터 프레이저는 노동조합 일에 관여하는 한편 뉴질랜드사회주의당(New Zealand Socialist Party)에서도 활동했다. 훗날 총리까지 지낸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의 국회의원(Auckland Central) 당선을 위해 선거운동 책임자로 땀을 흘렸다.

 

그는 누구보다 싸움을 좋아하는 노조원이었다. 1912년 와이히(Waihi, 코로만델 반도 끝)에서 광부들이 파업을 일으켰을 때 노조를 이끌어 나갈 정도였다.

 

1913년엔 웰링턴으로 옮겨가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창당에 힘을 보탰다. 파업이 있을 때마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결국 그는 경찰에 체포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몸을 담았다.



빛나는 연설, 빈틈없는 논쟁 돋보여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피터 프레이저는 징병제를 반대하는 집회를 주도한 죄로 1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마오리랜드 노동자』(Maoriland Worker)와 『'뉴질랜드 노동자』(The New Zealand Worker)라는 잡지의 편집일을 맡았다. 노동당(Labour Party) 기관지들이었다.


피터 프레이저는 1918년 웰링턴 센트럴(Wellington Central) 지역구에 출마, 국회의원이 됐다. 그 뒤 1946년까지 약 30여 해를 지역(훗날 브루클린, Brooklyn으로 바뀜) 국회의원으로 일했다. 오랜 기간 야당의원으로 지내면서 정권을 물려받을 준비를 했다. 

 

피터 프레이저의 빛나는 연설과 빈틈없는 논쟁은 다른 사람이 따라 할 수 없었다. 끊임없는 에너지를 쏟아내면서 정책을 하나하나 마련해 나갔다.


 때가 무르익어 1935년 마침내 노동당이 정권을 잡았다. 20년 전 힘을 보태준 마이클 새비지가 총리에 올랐고 피터 프레이저는 부총리를 맡았다. 그는 교육과 의료 정책을 책임졌다. 하루 17시간에 가까운 초강도 의정활동을 따라올 적수가 없었다. 피터 프레이저는 중등교육(Secondary Education, 한국의 중고등학교)의 중요성을 알리고 사회보장제도의 기초를 놓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마이클 새비지 총리는 1940년 3월 지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바통은 자연스럽게 피터 프레이저로 넘어갔다. 불행히도 남태평양의 작은 나라, 뉴질랜드 입지가 위태로울 때였다. 하지만 ‘난세에 영웅이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듯 피터 프레이저는 떳떳이 대처해 나갔다. 미국 영국 호주 같은 큰 나라들을 상대로 자주외교를 펼쳤다. 2차 세계대전 기간에 피터 프레이저의 영도력은 그렇게 빛났다.

 


난세에 영웅 역할 잘 감당해


 피터 프레이저는 국가 지도자로서 난세에 제 몫을 다했다. 국민이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용감하게 대처해 나갔으며, 국제관계에서 꿀리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뉴질랜드가 결코 만만히 볼 나라가 아니라는 걸 만방에 알린 지도자였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창설 모임에서 피터 프레이저는 약소국을 대표해 연설했다. 그 자리에서 미국 영국 같은 다섯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강력하게 성토했다. 작은 나라들도 유엔에서 제 몫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누구도 선뜻 나서서 하지 못한 일갈로, 뉴질랜드의 자존심을 맘껏 보여주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피터 프레이저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았고, 관용이 없었고, 적수들을 따돌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설령 그 주장이 맞는다고 하더라도 뉴질랜드 역사는 피터 프레이저를 ‘자국 정치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난세에 지도자 역할을 훌륭히 해내 오늘의 뉴질랜드를 만든 위인이 피터 프레이저라는 평가다.


<글_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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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22-03-29 12:38:38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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